일본경제의 거품이 절정이던 1989년, 책 한 권이 일본의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誌) 국제경제 담당기자 빌 에멋이 쓴 ‘해는 다시 진다’는 일본의 거품 붕괴와 장기침체를 예고했다.
2년 후인 91년부터 일본의 거품은 본격적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그의 예측은 지금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겠지만 당시만 해도 미국 내에서 일본경제가 곧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란 경고가 잇따랐음을 생각하면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그가 93년부터 편집장을 맡은 이코노미스트가 지난해 10월 ‘해는 다시 떠오른다’는 제목으로 일본경제 특집을 엮었다. 이미 일본경제의 회복 기미가 뚜렷해진 시점의 특집이어서 특별한 예측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 후 일본경제의 회복 속도는 한결 빨라졌다. 올 들어 일본신문에는 업계의 투자 확대 소식이 굵직굵직한 활자로 박히고 있다.
신닛테쓰(新日鐵) 등 철강 4사가 고급강재 생산설비를 중심으로 2009년까지 6,000억엔을 투자하고, 마쓰시타(松下) 전기가 1,600억엔을 들여 2007년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생산 설비를 갖춘다는 것 등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침체가 있으면 회복이 따르는 것이 자본주의 경기순환의 기본구조다. 일본경제가 장기불황 터널을 빠져 나와 재생의 길에 들어선 것도 전혀 새로울 게 없다.
그러나 비슷한 경기회복이라도 침체기에 어떤 짐을 털어냈는지, 무엇을 회복과 재생의 기본 동력으로 삼고 있는지는 저마다 다르다. 에멋은 일본경제 재생의 배경은 금융기관 부실채권과 과잉생산, 과잉고용 등의 거품 해소와 경제 유연성 증가라고 진단했다. 일본경제의 호황이 전에 없이 장기간 지속되리란 전망도 이 때문에 나온다.
■거품 해소나 경제 유연성의 예로서 흔히 거론되는 고용 유연성, 기업경영의 투명성 등은 외환위기를 거치며 한국경제가 이뤄낸 성과이기도 하다. 차이가 있다면 고용 유연성의 속내용이다.
일본이 종신고용의 틀을 유지한 채 급여체계의 다양화 등을 선택한 반면 한국은 고용 틀 자체를 허물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기업의 단기 실적에서 한국이 앞설 것은 뻔하다.
그러나 저출산ㆍ고령화는 물론 양극화에까지 가속도가 붙은 한국에서 기업이 주주자본이익률(ROE) 등의 지표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다. 벌써부터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사회야!”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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