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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강정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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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강정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입력
2006.01.07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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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본령은 창조다. ‘창조’라는 말이 무엄하게 느껴진다면 ‘해석’이라고 해두자. 시는 인간과 세계, 그리고 우주를 해석한다. 그 해석이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것 혹은 경험은 했겠지만 빛이나 호르몬의 착란쯤으로 여겨 스쳐버렸던 것들을 선연하게 드러낼 때 우리는 소스라치기도 하고, 자지러지기도 한다. 그 전율의 소스라침은 해석이 창조의 위의를 건드릴 때 이는 파문이다.

시인 강정의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문학동네, 7,500원)은 그가 해석(어쩌면 창조)한 “풍성한 은닉”(‘불면’)의 우주와 세상의 지도이고, 언어적 도해다.

우선 주재료들- 시간 태양 별 달 바람 인간 짐승-만 펼쳐놓고 본다면, 그의 우주 형상은 언뜻 정형화된 구상회화의 한 장면으로 수렴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를 소스라치게 만드는 우주에는 뭔가 낯설고 충격적인 것, 우리의 이성과 논리로 납득할 수 없는 미지의 것, 그래서 두렵고 불편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우주 괴물’ 같은 것.

그의 시작(詩作) 방법론, 달리 말해 요리와 조미의 비법을 살짝 드러낸 ‘우주 괴물’이라는 시는 머리에 이런 구절을 얹고 있다. “…수천 광년 동안 사막과 바다를 건너온 별이/ 내 느슨한 항문을 열고 있다/ 몸 속을 검은 바람이 할퀴고 지난다/(…)/이제 다른 인간이 태어나야 한다” 별빛에 감응해 몸이 열리고, 바람으로 수태하는 존재, 또 그가 낳은 이 “새로운 인간은 대지와 하늘,/ 종족과 국가를 불문하고 별을 알(卵) 삼아/ 두터운 시간의 견갑골을 깨뜨린다”. 그렇다고 이 ‘괴물’들이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무성생식”(표제시)하거나 난생(卵生)하는 종자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관능으로 잉태되어 젖을 먹기도 하고(‘두번째 아이’) “마침내 나를 점령”(‘불면’)해 합체 변신도 하고, 가슴을 찢고 태양의 형상으로 분만 되기도 한다(‘해산하는 태양’).

이 몽상의 우주에서는 배경과 주체, 생물과 무생물, 심지어 시간과 공간조차 다른 종이 아니어서 서로 교미하며 전방위적으로 교감한다. 그 소통과 교감의 수단이 ‘말’이 아님은 자명하다.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책에 쌓인 먼지”나 “같이 있다 방금 자리를 뜬 사람의 미진한 온기 따위”일 수도 있다.(표제시) 그들이 소통하는 시공간은 “앞발이 내딛는 삼백만 분의 일 초 사이에서/ …문득 절벽이 되고/ 뒷발이 밀리는 오백만 분의 일 초 사이에서/ …불현듯 새로운 별을 임신한 채 멀고 먼 은하에서 실족”(‘들판을 달리는 토끼’)하는, “永遠不滅이 一場春夢으로 얼어붙는 여름의 거리”(‘타고 남은 초신성’)이고, “몇 마디 긴 호흡의 이랑 사이에서/ 수세기 전의 불빛이 명멸”하는, 무시(無時) 무공(無空)의 세계다. 이 통 큰 감각의 진폭을 두고 시인은 “상상이나 몽상이라 해도 좋고, 망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했다.

이 허기져 난폭한 몽상의 해석자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고 했다. “일방적으로 제시된 언어(논리 언어)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懷疑)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감각을 따라잡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가 있잖아요. 그 결핍이 욕망을 낳고, 욕망이 결핍을 낳고….” 이를 함성호 시인은 해설에서 “상징을 찾아 떠난 (끝 모를)여행”이라 했다. 이번 시집은 92년 등단한 시인의 첫 시집(‘처형 극장’1996, 문학과지성사) 이후 10년 만이다.

표제시에서 그는 “내가 들려주려는 말이 결국 내 체온을 액면 그대로 종이 위에 처바르는 일”이라 했다. 그래서 그는 제 몸을 학대해서라도 늘 발열한다. 그렇게 익혀낸 이 불온한 아름다움의 우주를, 시에서는 “허공이라 한들 어떠리”라더니, 만나서는 대뜸 “진동이라 하면 또 어떠리”라고 했다.

▲ 불면

오래 전에 본 적 있는 그가 마침내 나를 점령한다

창가에서 마른 종잇장들이 찢어져

새하얀 粉으로 흩어진다

몸이 기억하는 당신의 살냄새는 이름 없이 시선을 끌어당기는 여린 꽃잎을 닮았다

낮에 본 자전거 바퀴살이 허공에서 별들을 탄주하고

잠든 고양이의 꼬리에선 부지불식 이야기가 튕겨져나온다

내 몸을 껴입은 그가 밤이 가라앉는 속도에 맞춰

거대한 산처럼 자라나 풍경을 지운다

천체를 머리맡에 옮겨다놓는 이 풍성한 은닉 속엔

한 점의 자애도 없다 온통 가시뿐인 은하의 속절없는 일침 뿐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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