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보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해마다 연초면 달력을 펴놓고 지갑 사정을 따져본다.
보고 싶은 건 많고 돈은 없다. 무엇을 봐야 할지 고민고민 하다가 골라서 달력에 하나씩 표시한다. 그리고 적금을 붓거나 깬다. 기대작이 어느 시기에 몰리면 아예 휴가를 그때에 맞추기도 한다.
올해의 많고 많은 공연 중 놓치면 후회할 무대를 장르별로 하나씩 추천한다. 이건 사실 무리한 선택이다. 취향의 차이를 무시한 만행일 수도 있다. 독자 여러분, 혜량해주시길.
연극-레프 도진의 연극 '형제자매들'
1·2부 나눠 7시간 대형작 스탈린 치하 민중 삶 생생
2001년 7월, ‘가우데아무스’를 본 사람은 그들의 꿈에 감염되기 시작했다.
무대를 통해 인간은 다른 차원의 현실로 승화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군대 생활을 주제로 한 19편의 즉흥극은 그 흔해빠진 첨단 멀티미디어도, 테크놀로지도 없이 오직 인간의 현존만으로 이뤄지는 무대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입증했다.
그것은 희랍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연극이란 기본적으로, 아니 근본적으로 ‘배우의 현존’이어야 함을 웅변했다. 눈만 뜨면 가상 현실이다 뭐다 해서 사이버 문명에 주눅들던 한국인에게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연극 집단 ‘말리 극장’은 인간의 꿈이란 무엇인지를 상기시켜 주었다.
5월, 그들이 다시 온다. 이번에는 중간 휴식을 합쳐 공연시간 7시간의 대작 ‘형제 자매들’이다. 페드로 아브라모브 원작으로 1985년 초연된 이 작품은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스탈린 정권의 억압 아래서 러시아 민중이 어떻게 그 엄혹한 시간을 버텨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러시아 연극의 부흥을 일으킨 주역인 거장 레프 도진이 연출하고, 잘 훈련된 40여 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연극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위협을 받고 있는 한국에서 런던, 파리, 시카고 등지의 눈 높은 관객을 사로 잡은 도진의 휴머니즘과 연극론은 이번에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까. 5월 20, 21일 LG아트센터 공연. 러시아어에 한글 자막.
무용-얀 파브르 '눈물의 역사'
나체 무용수 등 파격무대 내달 예술의 전당서 공연
지난해 여름 아비뇽 페스티벌의 개막 작품 ‘눈물의 역사’는 쇼크를 일으켰다. 한쪽에서는 열광했고 다른 한 쪽에서는 격분했다. 수 백 개의 유리 그릇과 수십 개의 사다리 같은 오브제, 10여 명의 무용수가 15분 동안 울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시작해 20여 명의 무용수가 나체로 무대를 뛰어다니는 도발적인 표현까지 이 작품이 보여준 실험은 극한을 달렸다.
벨기에 출신의 전방위 예술가 얀 파브르(48)가 대본, 안무, 연출, 무대 디자인을 도맡은 무용극이다. 무용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작품이자 연극ㆍ음악ㆍ무용 등 여러 장르를 융합한 총체극에 가깝다. 그의 작품은 너무 파격적이어서 늘 격렬한 논란에 휩싸이곤 했다.
얀 파브르는 아방가르드의 정점이다. 연극ㆍ무용ㆍ오페라를 종횡무진하는 무대예술가일 뿐 아니라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받는 화가 겸 건축가이기도 하다. 이런 다재다능함 덕분에 르네상스 시대의 만능 천재 다빈치에 견주어 ‘현대의 다빈치’로 불린다.
‘눈물의 역사’는 예술의전당이 유럽 5개국과 공동제작해 아비뇽에서 초연했다. 당시 일대 파란을 불렀던 이 작품을 서울로 가져와 2월 10~12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올린다. 한국 관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음악-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 첫 내한공연
러 출신 천재 피아니스트 4월 쇼팽 곡 등 환상연주
10년을 기다렸다. 드디어 온다.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 그의 내한공연이 확정됐다는 뉴스가 나온 뒤에도 초청 기획사에는 “정말 오느냐?”고 묻는 전화가 줄을 이었다. 팬은 학수고대 했지만 그동안 이런저런 사정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올해 25세. 천재 중의 천재,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의 피아니스트로 꼽힌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음악 신동은 참 많다. 하지만 키신은 더 특별하고 놀랍다. 세상 구경한 지 18개월 만에 바로 드러났다. 열 살 위 누나가 피아노로 바흐의 푸가를 치는 것을 듣고 선율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부른 것이다.
10세에 모차르트 협주곡 연주로 데뷔하고, 이듬해 첫 독주회를 했으며, 12세에 쇼팽 협주곡 연주로 국제 무대에 떠올라 남들이 통과의례처럼 거치는 모든 콩쿠르를 생략한 채 10대 후반에는 벌써 전문 연주자로서 세계적 스타가 됐다.
이 놀라운 신화는 자칫 거품 또는 굴레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나이를 믿을 수 없는 원숙하고 독자적인 연주만큼이나 슬기롭고 신중한 처신으로 부동의 자리를 굳혔다.
4월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등장한다. 베토벤 소나타 3번과 26번 ‘고별’, 쇼팽의 스케르초 전곡(1~4번)을 연주하는 독주회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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