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마치면 결혼하고 친구 신랑의 승진까지 신경 쓰며 아이 뒷바라지 하면서 아파트 평수 늘리려 아등바등 사는 평균치의 한국 아줌마. 그러나 어릴 때부터 유독 자유를 갈망했던 한현주(44)씨는 이런 틀에 박힌 삶을 거부하고 세상 구경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한번 발동한 방랑기는 주체할 수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다음 여행을 계획하던 유랑족이 돼 버린 그는 서른 살이 되던 해, 부다페스트의 한 레스토랑에서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난다. 또 다른 집시족 토니 코락(55). 1991년에 결혼하고 줄곧 세계 곳곳을 떠돌아 다니던 둘은 2000년 토니의 고향인 호주 태즈매니아에 딸린 작은 섬 브루니에 정착했다.
이후 도시에 사는 가족과 친구한테서 똑 같은 질문을 받고 또 받는다. “외롭지 않느냐, 돈은 어떻게 버냐, 대체 아무 것도 없다는 섬에 박혀 매일 뭘 하느냐?” 그렇고 그런 호기심….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는 건 다들 비슷하잖아요. 일하고 가끔은 사소한 걸로 다투기도 하지만 사랑하며 사는 것. 단지 시장에 가는 대신 조개와 굴, 물고기를 직접 잡고 가꾼 야채로 저녁상을 준비한다는 게 다르죠. 나무 땔감 모아 불을 지피는 일과 라벤더 농장일, 아르바이트 등 할 일은 무궁무진해요.”
거기서는 돈 쓸 일이 없다. 그래서 벌 필요도 없다. 태양열 집으로 전기료도 안 내고 빗물과 지하수로 물값도 안 내며, 생선을 잡고 야채를 재배하는 덕에 식비도 안 든다. 가끔 돈이 필요하면 친구 농장 일을 거들거나 사진을 찍는 아르바이트를 할 뿐.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다. 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그토록 풍요로웠던 시간이 없었다. 호주 외딴 섬에 살기로 한 것은 서두르지 않고 최대한 단순히 살아 보기 위함이었고 지금 그 곳 생활은 그에겐 지상의 천국이다.
“자라 온 문화가 너무 틀리다 보니 힘들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에게서 넓은 시야를 보는 법을 배웠지요. 모든 부부가 그렇겠지만 14년을 함께 하다 보니 이제 생체 리듬까지도 같아요. 더 소중하고 포근하고, 아마 지금이 진짜 사랑인 것 같습니다. 남편과의 관계도 끊임없는 여행인 셈이예요.”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답던 5년 전 12월 어느날, 호주를 샅샅이 더듬는 9개월의 긴 여행 중에 그들은 호주 남쪽의 한 외딴섬에 반해 버렸다.
해안선을 끼고 유칼리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야산을 보는 순간 한씨는 말했다. “바로 이 곳이야. 이 넘실거리는 바다가 있는 여기야말로 우리가 남은 생을 보낼 곳이야.” 다른 곳도 한번 보고 결정해야 하지 않겠냐는 남편 토니의 말에 그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목수 한 명만 있으면 집을 지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간단치가 않았다. 바닷가 앞에 자그마한 집은 완성하는데 꼬박 5개월이 걸렸으니까. 강아지 집한 채 지어 본 적 없던 그들은 낑낑거리며 콘크리트도 붓고, 한씨의 제안대로 한국 온돌처럼 바닥에 폴리파이프도 깔았다. 말 그대로 모험이었다.
“크게는 어떤 집을 원하는 지부터 장소 설정, 외관 재료, 색깔, 비중, 바닥, 물탱크 크기, 또 작게는 수도꼭지, 문고리, 화장실 변기 선택까지 수백 가지 결정을 해야 하잖아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또 다른 여행 같아서 행복했어요.”
집을 다 짓고 그가 서울에 계신 어머니한테 전화를 했더니 대뜸 방은 몇 개냐고 물었다. 한국식이었다. “아무 말도 못 했어요. 방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하하” 거실과 부엌이 함께 있는 6m, 9m의 트인 공간에 욕실과 암실 하나가 전부다. 잠은 지붕 아래 다다미 4개 크기의 작은 다락방에 요를 깔고 잔다.
그림 대신 그들의 집에는 큼직한 유리창이 있다. 그 곳에는 매일 변하는, 그래서 싫증나지 않는 바다와 하늘, 산, 구름, 숲, 햇살, 비, 바람이 담긴다.
잠에서 깨어나 창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외롭지 않냐고 많이 물어요. 책과 자연이 늘 함께 하는데 어떻게 외롭겠어요? 특히 부자인 사람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바다. 그 넉넉한 공간 때문에 외로울 틈이 없어요. 가끔 서울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울 땐 있지만요.”
지금껏 그랬지만 그들은 가끔 날을 잡아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그것은 바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언젠가 농장 일을 하겠다고 나선 남편이 삼십분도 안 돼 돌아왔다. 뭘 잊어 버린 줄 알고 빤히 쳐다보자 “일하기엔 너무 아름다운 날씨야. 파도 타러 안 갈래?” 하고 물었다. 삽과 보트가 바뀌는 순간. 자유는 이래서 짜릿하다.
요즘은 6개월 난 아기 캥거루 ‘규조’ 때문에 바쁘다. 차에 친 어미 캥거루 뱃속에 있던 아기를 키우는 중인데 4시간마다 우유를 먹여야 한다. 이제는 제법 자랐지만 아직도 세상 밖으로 나가려면 몇 달은 더 있어야 할 모양이다.
“아기요? 다음 세상에서는 7~8명 낳고 싶어요. 집시족으로 살다 보니 아기 낳을 나이를 훌쩍 넘겨버렸지 뭐에요. 세상은 정말 공평해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신문과 TV도 없이 살아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어머니와의 통화에서나 한국 소식을 접하는 그. 중앙대 사진학과를 나와 잡지 프리랜서 겸 여행 전문가로 지내다, 운명의 남자를 만나 아주 큰 섬에 안착한 그가 최근 고향땅에 ‘섬 이야기(자인 출판)’라는 책까지 낸 이유가 있을텐데?
“꿈 많은 젊은이들에게 좀 다른 세계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느끼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내가 진정 내가 될 수 있는 그런 삶 말이지요.” 도대체 그 섬 구석에서 뭘 하고 사냐는 사람들의 질문은 생각해 보면 어리석다. 그에 대한 현답이랄까.
조윤정기자 yj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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