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 1,000원 선이 무너지자 전 언론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봇물 터진 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원화의 절상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고 연초 이래 국제유가 반등세가 맞물리면서 목소리는 더욱 다급하다. ‘수출기업 초비상’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마치 당장 수출이 결딴나고, 가까스로 궤도에 오른 경기회복세가 무산되기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세자릿수 환율은 이미 지난해부터 충분히 예상됐다. 더욱이 1990년대 말 이래 환헷징(환율변동 위험회피) 수단이 널리 퍼져 웬만한 기업이라면 진작부터 대비해온 터다. 외환시장 쪽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종합주가지수가 4일 1,400선을 손쉽게 돌파한 것도 시장에서는 아직 환율 우려 보다 펀더멘털에 대한 자신감이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면 환율에 대한 우려는 기우이거나 언론 특유의 호들갑에 불과한 것일까. 역사는 섣부른 낙관의 여지를 단호히 거부한다.
우리 경제에 사상 최악의 재앙을 초래한 국제적 환율변동은 95년 4월 중순 이래 약 9개월간 발생했다. 95년4월17일 79.75엔까지 수직강하했던 엔.달러 환율이 클린턴 행정부의 ‘강달러정책(strong dollar policy)’에 따라 96년1월 중순엔 105엔대까지 급등한 것이다.
이 결과로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불과 9개월 동안 무려 25엔(31%) 정도나 떨어졌다. 반면 같은 기간 달러 대비 원화 가치(원.달러 환율)는 770원대에서 790원대로 약 20원(2.6%) 하락하는데 그쳤다.
원.엔 환율변동의 이 같은 불균형은 세계시장에서 30% 이내의 가격차를 발판 삼아 일제를 맹추격하던 ‘메이드인 코리아’ 수출에 일대 타격을 가했다.
자동차.반도체.전기전자.철강 등의 수출전선이 96년 1분기에는 이미 괴멸적 상황에 빠졌다. 환율 급변동에 따른 수출 침체가 해외소비 증가 등 다른 요인과 맞물려 막대한 경상수지적자를 낳고, 결국 97년 경제위기를 촉발한 한 원인으로 작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에도 사태 초기에는 낙관론이 지배했다. 국제적인 외환 전문가들 누구도 엔화가 그렇게 빨리 떨어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엔화 약세가 뚜렷해진 95년 9월의 가장 비관적 전망도 연말 엔.달러 환율을 90엔 정도일 것으로 내다봤다.
이 같은 낙관은 국내 환율 정책 결정에도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했다. 사태를 낙관한 당시 나웅배 경제팀은 기업체질개선을 유도한다는 방침에 따라 원화의 비정상적 강세를 바로잡아 달라는 시장의 요구를 무시함으로써 재앙의 씨앗을 방치했던 것이다. 국제금융시장에서 환투기와 각종 파생상품이 판치면서 환율 변동성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팽창했다는 사실을 미처 체감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95년 이후 외환시장은 더 이상 이성적인 분석이나 경제 펀더멘털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됐다. 따라서 당분간 950원대, 또는 최소한 900원대는 유지될 것이라는 시장의 모든 예측도 기본적으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특히 달러 약세나 엔화 반등에 대한 광범위한 기대로 ‘시장의 쏠림’ 가능성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높은 요즘에는 언제라도 최악의 ‘환율 쓰나미’가 닥칠 수 있다는 각오로 상황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1,000원선이 무너진 원.달러 환율도 문제지만, 지난해 6월 930원대였던 엔(100엔).원 환율이 어느새 859원대로 내려앉은 것에도 유의해야 한다. 당장 환율 급변동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시장에서의 ‘스무딩 오퍼레이션(미세조정)’도 중요하지만, 언뜻 구태의연해 보이는 수많은 중견.중소 수출업체들의 지원요구도 미리미리 점검해 둬야 할 시점이다.
장인철 국제부 차장대우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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