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북핵 전망이 암담하다. 지난해 11월 5차 6자회담 1단계 회의에서 이번 달 중에 열기로 합의한 2단계 회의는 이미 물 건너간 분위기다. 회담 재개에 최대 장애물로 부상한 북한 위조지폐 문제가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탓이다.
북한이 6자회담과 위폐 문제를 연계시켜 금융제재 해제를 6자회담 재개의 전제로 요구하는 것은 억지다. 그러나 미국의 접근방식도 이해하기 어렵다.
최근 미국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북핵 문제 해결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6자회담 재개 난기류
미 정부가 북핵 문제를 화급하게 여기고 있다면 지금처럼 위조지폐 문제와 인권문제를 한꺼번에 들고나와 초점을 흐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국제정치컨설팅 업체인 유라시아그룹이 4일 발표한 ‘2006 세계 7대 리스크’에 북핵 문제를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의 조야가 겉으로 표현하는 말과는 다르게 북핵 문제를 그만큼 심각하게 보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은 역설적이게도 6자회담의 성과다. 6자회담 참가국들은 지난해 9ㆍ19공동성명을 통해 북핵 문제의 폭발성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미국으로 하여금 대북 금융제재와 인권 공세 강화 등의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이제 미국은 많은 대가를 지불해가며 북핵 문제 해결을 서두르기보다는 서서히 북한을 옥죄는 길을 택할 개연성이 크다. 물론 위험부담이 큰 군사적 조치를 취하고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미국에 6자회담 지연의 책임을 전가시키며 시간 끌기를 통해 핵 억지력을 강화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북한과 미국의 이익이 교묘하게 맞아 떨어져 돌아가는 형국이다.
물론 북한은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 지난해 ‘2ㆍ10 핵보유 선언’과 같은 자극적인 핵 시위를 하고 나설지도 모른다. 지난해 설이 분분했던 핵실험도 그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통해 결국 북한이 얻을 것은 없다.
핵 무기 보유를 늘리는 것은 김정일 체제 연명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하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북한이 기어이 핵 보유를 관철하려고 할 경우 현재 북한의 체제 유지에 물질적 뒷받침이 되고 있는 남한과 중국의 지원이 계속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남한과 중국은 적어도 북핵 불용이라는 입장에서는 미국과 이해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선제적 양보(Preemptive Concession)를 통한 국면 주도가 가장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선제적 양보론은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공산국가와의 협상방식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한 쪽이 먼저 과감하게 양보할 수 있는 최대치를 내놓고 양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협상하는 방식으로 협상 대상을 잘게 나눠서 하나하나 매듭을 지어가는 살라미 방법(Salami Method)과는 대비되는 협상술이다.
국가간 협상에서 선제적 양보는 강자가 약자를 합의로 이끌어 내기 위해 구사하는 협상 방식이라는 점에서 북한에 대해 선제적 양보를 주문하는 것은 난센스일 수도 있다. 그러나 6자회담 구도에서 보면 북한이 약자의 입장만은 아니다. 중국과 한국 정부가 김정일 위원장이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을 해 나가겠다면 적극 이를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北이 선제적 양보 조치를
다른 주변 국가들도 김정일 체제의 갑작스러운 붕괴가 가져올 재앙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단은 김정일 체제의 안정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다. 김 위원장이 지혜롭다면 이런 구도에 기대서 선제적 양보로 국면을 주도해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리스크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폐쇄적인 체제를 핵무기 보유로 지켜나가려는 시도보다는 훨씬 리스크가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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