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한국사회의 위기를 지적하기 위해 언론에서 즐겨 다룬 주제 가운데 하나가 중산층 몰락론이다.
경제난을 겪으면서 중산층이 무너지고, 중산층이 위기의식과 박탈감에 빠지면 사회 안정이 깨지고 불안과 혼란이 초래된다. 정부는 시급히 보호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논리다. 중산층 위기론은 그 뒤로도 심심치 않게 기사로 재생산되고 있으며, 또 국민의 다수가 그런 추세를 믿고 때로 심히 우려한다.
하지만 한국산업사회학회 이론-이데올로기 분과는 이런 ‘중산층 위기론’이 실체가 있는 것인지 외환위기 직후부터 적잖이 의심했다. ‘언론의 상황 판단과 주장이 스스로 중산층인 언론인들이 펴는 엄살이 아니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그 엄살에 동원되는 논리와 자료 또한 모순적, 역설적, 편파적, 피상적인 것’이 아닌지 짚어보는 연구 작업이 시작됐다.
그 성과를 담아 최근 출간된 ‘중산층의 몰락과 계급양극화’(소화 발행)는 중산층 몰락론이 허구라고 주장하는 논쟁적인 책이다.
공동 저자인 유팔무(한림대) 김원동(강원대) 박경숙(동아대) 교수는 중산층의 개념 정의부터 문제 삼았다. 주류 학자들은 ‘중간계층’ ‘중류층’이라는 용어를 써가며 중산층을 소득수준이나 생활수준이 중간쯤 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간주한다. 일부 학자들은 주관적인 귀속의식까지 중산층을 분류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런 분류는 ‘자의적 임의적이기 때문에 실체를 잡을 수 없고, 연구자가 그때그때 다른 집단을 중산층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분석이나 비교연구 등이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저자들은 대신 계급론에 따른 중간계급을 중산층에 해당하는 객관적인 실체를 가진 집단으로 봤다. 그 중간계급은 흔히 구중간계급이라 부르는 맑스의 중간계급에다 사무직 화이트칼라 노동자 등 이른바 신중간계급을 합친 개념이다.
이 경우 중산층은 모두 네 부문으로 나뉜다. 생산부문에서는 ▦자본주의 기업의 화이트칼라 노동자 ▦비자본주의 조직 부문의 도시ㆍ농촌 자영업자, 비생산부문에서는 ▦자본주의 조직 부문의 비생산적 화이트칼라 노동자 ▦비영리 공공ㆍ민간서비스 종사자이다.
이런 잣대로 1990년대의 중산층 인구비중 변화를 살피면 1991년에 중산층은 67.2%, 노동자계급은 28.5%, 95년에 중산층 67.3%, 노동자 30.5%로 증가 추세였다.
하지만 외환위기 직후인 98년에 중산층은 57.5%로 줄어들고, 노동자계급은 35.0%로 늘어났다. 하지만 저자들은 중산층의 비율이 IMF 사태의 충격으로 줄었어도 주로 화이트칼라와 자영업자에 집중됐고, 전문직이나 공공서비스부문 종사자들은 거의 현상을 유지했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지위가 하락한 중산층 일부(20% 이상)는 1년만에 복원됐다고 덧붙인다.
‘20대 80’ 사회를 증거하는 자료로 흔히 인용되는 소득격차 확대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상위 20% 소득계층의 전체 소득 중 점유율은 96년 55.2%에서 98년 67.1%로 늘어나고 2000년에는 다시 70.6%로 증가한다.
중위 60% 계층과 하위 20% 계층의 경우는 점유율이 IMF 사태 직후에는 많이, 그 후에는 조금씩 줄어 2000년에는 각각 24.7%와 4.7%가 됐다. 계급론적 관점에서 자본가계급의 인구가 10% 미만이라고 한다면, 고소득층 20% 가운데 절반 이상의 사람들은 중산층이므로 소득상의 빈부격차 수치는 상당 부분 중산층 내의 고소득층과 중저소득층 격차를 반영한다. ‘어떤 중산층이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귀속의식의 변화는 조사기관마다 수치가 다르지만, 신빙성 있다고 볼 수 있는 통계층의 조사를 보면 중류층 혹은 중산층 귀속의식을 가진 사람이 91년 61.3%, 94년 60.4%, 외환위기 이후 54.9%, 2003년 56.2%로 변한다. 중산층이 실제로 엄청나게 줄지도 않았고, 더 중요한 건 ‘그런 귀속의식이 아무리 줄고 줄어도 50% 이상의 인구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중산층의 이념 성향과 관련해서는 90년대만 따져도 애초 ‘보수가 강했고 갈수록 보수 추세’라고 지적했다.
저자들은 중산층 몰락론이 ‘긴 시간 스펙트럼에서 추이를 보면 증거가 불충분’한 논리라며 ‘노동자와 서민의 고통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중산층이 이들과 같아지는 것을 우려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대책에만 열중하는’ 정치적인 편파성을 가진 논리라고 비판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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