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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희망하기

입력
2006.01.0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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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 야트막한 동네 야산의 약수터에 갔다. 날씨가 풀려 샘 가에 두텁게 쌓였던 얼음이 녹아 바닥의 자갈이 드러나 있었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표정은 특별히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두런거리다가 바쁘게 물병을 씻고, 물을 담아 지고 산을 내려갔다. 사람을 겁내지 않는 꿩과 새들이 말라붙은 풀숲을 뒤지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하늘은 흐리다가 맑았다가 했다. 졸졸 흘러나온 물맛은 여전히 상쾌했다. 바람 불어 나뭇가지 흔들리는 산에서 자연의 시간은 흐린 겨울 아침을 가리키고 있었다.

■ 인위적 시간은 달랐다. 동해에서는 유난히 크고 붉은 해가 구름 사이로 떠올랐고, 100만 명이 넘었다는 해맞이 관광객으로 바닷가에 활기가 넘쳤다. 스키장과 고속도로의 긴 행렬도 다른 공휴일과는 달리 짜증보다 활기로 비쳤다. TV는 늘 그랬듯 인위적으로 설정된 시간에 맞추어 해가 바뀌는 순간의 희망을 길어올리기에 바빴다.

서울 도심에서는 ‘루미나리에’가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고,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이 TV 카메라 앞에서 새해의 희망을 말하기에 바빴다. 보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뛸 만했다.

■ 세상을 가르는 것은 남성과 여성, 젊은이와 늙은이, 돈 있는 자와 없는 자, 힘 있는 자와 없는 자만이 아니다. 인위적 시간의 경계선을 넘으며 희망을 말하는 사람과 말하지 않는 사람으로도 갈라져 있다. 대개는 TV 중계에 맞추어 희망을 끌어내려고 애써 보지만 끝내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사람도 많다.

막연히 빌어보는 소망과 최소한의 예측가능성을 근거로 한 희망은 다르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는 그 순간에도 신학기 등록금과 뛰어 오르는 집세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을 카메라가 비추지 않았을 뿐이다.

■ 희망하기는 개인의 삶에 적지 않은 위로가 되고, 행복을 갖다 준다. 삶의 행ㆍ불행이 어차피 객관적 수치가 아닌 주관적 태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가 바뀔 때마다 희망하기를 가르치는 것도 사회적 미덕일 수 있다.

그러나 주관적 판단에 좌우돼서는 안 될 조직과 국가 차원에서 희망하기만 가르치고, 희망만 말하는 것은 국민에게 더 없는 절망이다. 지혜롭고 충성스러운 개들이 상징하는 올해 지난해와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금 위정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을 잃어가는 국민을 직시할 때 갖게 되는 꾸미지 않은 절망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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