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46) '메소드 연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46) '메소드 연기'

입력
2006.01.03 11:36
0 0

미국의 명배우 말론 브랜도가 연기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핵폭탄이 터지기 직전 닭들이 보일만한 반응을 연기하라는 지도교수의 과제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겁에 질려 날뛰며 소리를 지르는 닭들의 행동을 연기했다. 그러나 연습실 한구석에서 특유의 시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던 말론 브랜도는 자기 차례가 되자 어슬렁어슬렁 무대로 걸어 나오더니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눈알을 뱅글뱅글 돌리며 닭이 알 까는 시늉만으로 연기를 마쳤다.

어리둥절해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향해 내뱉은 말론 브랜도의 한 마디는 이랬다. “우라질, 꼬꼬닭 주제에 핵폭탄이 터진다는 걸 어떻게 알겠어?”

꽤 오래 전 어디선가 읽은 이 이야기는 연극이나 영화계에선 전설로 통하는 일화다. 그러나, 이야기의 기본골격은 가감 없이 옮겼으되, 그 당시 말론 브랜드가 정말 시건방진 표정으로 저런 멘트를 날렸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저 내가 기억하는 말론 브랜도의 이미지만으로 약간의 첨삭을 가한 것인데, 어쨌거나 그닥 어긋나는 내용은 아닐 듯싶다. 말론 브랜도는 소위 할리우드의 스타제조 공장으로 유명한 액터스 스튜디오 (The Actors studio) 출신이다.

위에 든 일화도 그가 액터스 스튜디오의 학생 시절 일어난 일로 알고 있다. 말론 브랜도 외에도 제임스 딘,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스티브 맥퀸, 더스틴 호프만, 잭 니콜슨, 제인 폰다, 하비 케이틀 등 액터스 스튜디오가 배출한 명배우들을 일일이 나열하는 건 시간 낭비요 종이 낭비에 불과하다. 분명한 건 액터스 스튜디오를 통해 연기에 대한 혁명적인 인식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은 리 스트라스버그였다.

1901년 폴란드 부드자노우에서 태어나 1909년 뉴욕 이스트사이드로 이민 온 그는 어릴 적부터 연극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이십대 초반, 아메리칸 라보라토리 씨어터에서 배우로 훈련을 받은 그는 1936년 연출가로 독립해 1951년 액터스 스튜디오의 예술감독이 되었다.

그 후 그는 모든 미국배우의 연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그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라는 개념이다. 리 스트라스버그는 1982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지만, 액터스 스튜디오의 메소드 연기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대물림되어 수많은 배우들의 필수적인 연기기법으로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해 메소드 연기의 기원은 리 스트라스버그가 아니다. 그에 의해 하나의 엄밀한 이론적 기초가 정립되긴 했지만, 그 이전까지의 연극이 가지고 있던 허황된 과장의 기름기를 차갑게 제거해 실제적 감정 및 행동과 일치하는 연기방법을 최초로 제안한 사람은 러시아 출신의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라브스키이다.

리 스트라스버그는 자신보다 한 세대 앞서 완성된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론의 핵심을 근간으로 메소드 연기를 완성했던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주된 연기이론으로서의 메소드 연기를 얘기하면서 스타니슬라브스키와 리 스트라스버그는 마치 예수와 베드로의 관계처럼 떼어놓을 수 없다.

더욱이 여타의 예술가들처럼 독립적인 가치를 지닌 작품을 가지고 그들을 운위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배우들의 연기 이면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죽지 않는 배후’이기도 하다. 그들은 메소드 연기라는 이름으로 무수한 배우들의 몸을 빌려 수시로 환생한다.

모든 무대는 어둠을 기초로 한다. 실제 배우가 등장하는 연극이든, 스크린이라는 가상의 막에 환의 이미지로 펼쳐지는 영화든 가상의 세계 속에서 특별한 인격을 가진 인간이 나타나려면 어둠은 필수적이다. 그 어둠을 거창하게 태초에 비유하든 생명 탄생의 양수로 비유하든 그리 틀릴 건 없다.

그러나 서막이 펼쳐지기 전의 그 긴장되고 고요한 어둠에 대한 이런 고색창연한 비유는 근사하되, 적확치는 않다. 무대는 뭔가를 탄생시키기 보다는 기존에 있는 어떤 것들을 전혀 다른 차원의 시공간에서 불현듯 상기시킴으로써 특별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관객을 이끄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어둠은 차라리 늘 함께 하고 있으나 은폐되어 있는 어느 특정한 감정과 느낌, 행동의 원천으로서의 육체의 장막에 가깝다. 메소드 연기의 기본은 육체의 장막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감정과 생각을 끄집어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기 위해선 육체가 과연 어떤 식의 구조와 얼개로 이루어져 있는 지에 대한 엄밀하고도 과학적인 자각이 필수적이다.

하나의 감정이 발생할 때 이루어지는 한 사람의 행동과 목소리와 말투는 오랜 시간 누적된 육체의 관성적 반응에 의해 통합적으로 형성되어지게 마련이다.

배우란 바로 그 특정한 태도의 관성을 무시로 깨뜨려 일상과는 다른 말투와 다른 태도를 창조해내는 사람이다. 그럼으로써 몸 안에 갇혀 있는 다른 인격이 한시적으로 완성되어 극(劇)의 사실성을 보지하게 된다. 이건 배우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의 기본인 동시에, 늘 완결되지는 않는 영원한 배우수업의 첫째 항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배역이란 허구의 존재가 어떠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연말 시상식 같은 데 꽃단장하고 나와 수상소감을 하는 배우들이 흔히 ‘배역에 푹 빠져 살았다’고 말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배우가 푹 빠져 살 수 있는 가상의 인격은 배우의 외부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봐야 한다.

배우는 자신의 육체 속에 갇혀 있는 감정을 상기하는 방식으로 육체의 메커니즘을 전면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하나의 배역을 완성해낸다.

리 스트라스버그가 ‘감정의 기억’이라 부른 그러한 심리적이고도 육체적인 연금술은 리 스트라스버그 스스로가 밝히듯, 낭만주의 시대의 시적 방법론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다음은 리 스트라스버그가 ‘연기의 방법을 찾아서’(하태진 옮김, 현대미학사)에서 인용한 시인 워즈워드의 말이다.

‘시는 강력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넘쳐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해왔다. 그 근원은 고요한 가운데 감정을 회상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 감정은 일종의 반응이 일어나 고요함이 사라질 때까지 숙고되고, 숙고의 대상 앞에서 불타던 감정은 점차 솟구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마음속에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어 리 스트라스버그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두 가지 요소는 ‘뛰어난 감수성’과 ‘탁월한 사고력’이다. 어떤 예술이든 이 요소들이 중요하지 않겠냐마는 연기에 있어서 ‘뛰어난 감수성’은 스스로 불러일으킨 감정을 통해 특정한 정황과 육체의 메커니즘을 재창조해내고 ‘탁월한 사고력’은 허구로 존재하는 배역의 사고방식과 행동 패턴을 창출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건 자신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던 인격 이외에 다른 인간적 요소들을 스스로의 몸을 통틀어 재발견해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메소드 연기는 크게 소리치며 없는 감정을 과장하거나 마치 자기가 아닌 양 표피적으로 다른 사람을 흉내내던 이전의 연기기법과 갈라서게 된다.

그건 엄정한 해부학적 자각을 바탕으로 완성되는 육체의 유물론이다. 배우는 무엇보다 육체의 극한에서 다른 자아를 만들어내는 사람인 것이다.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유명한 연기론이고, 전 세계의 날고뛰는 배우들에겐 경전과도 이야기들이건만, 배우도 아닌 주제에 새해 벽두에 메소드 연기를 이야기하게 된 건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다. 소위 ‘인생은 연극’이라는 오랜 금언엔 사람에 따라 각기 상이한 방식으로 해석될 많은 함의가 숨어있다.

내 경우, 그 말은 삶 자체를 모종의 총체적인 에너지로 파악하고 실천하게 만드는 시금석으로 받아들여진다. 요컨대 사회적 관계나 이해타산에 의해 타성적으로 삶이 운용되면서 가식과 허위의 기름기로 덧칠되는 스스로의 인격에 대한 반성적 자각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세계는 내가 실제적으로 느끼는 감정과 생각과 행동을 제어하는 장막으로 작용한다. 그랬을 때, 나의 삶은 고작 제 몫의 밥그릇에나 헌신하는 자기은폐와 과장으로 일관하게 된다. 그러나 삶의 무대란, 그리고 발현되지 못한 자아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숨겨져 있는 감정의 소리는 부지불식 삶의 기반을 흔들며 내 몸이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이라고 외친다.

그 외침이 솟아나오는 내 몸의 어느 한 지점엔 죽음이 아니라면 되돌릴 수 없는 진정한 나 자신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무대에 오르길 기다리고 있다. 자기자신의 본연이란 그런 의미에서 늘 타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를 연기할 나의 배우는 아직 육체라는 분장실에서 대기중이다. 되도록 빨리 그의 연기력을 확인하고 싶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