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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의 신년 콩트/ 한내마을 신년 하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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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의 신년 콩트/ 한내마을 신년 하례식

입력
2006.01.0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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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해가 시작됐다. 시작하는 자리는 늘 어수선하다. 어떤 이는 야무진 작심(作心)의 목록을 챙길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미진했던 지난 해의 아쉬움을 채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어수선함을 다독이고 새로운 희망을 나누고자 소설가 구효서씨의 콩트를 싣는다. 구효서씨는 1987년 등단해 지금껏 25권의 소설을 쓴 중견 작가로 한국일보문학상과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한내마을 신년 하례식은 올해도 1월2일 오후 2시에 열렸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을회관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반가운 얼굴들도 보였지요. 회관 중앙에는 먹음직스런 떡과 과일과 고기접시들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길게 잇대어 놓은 교자상 주위로 모여 앉았습니다.

그러나 여느 해의 하례식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낯빛이 그다지 밝지 않았으니까요. 올해로 꼭 백세가 되는 동네 어른이 맨 앞 자리에 자리를 잡자 이장이 마이크를 들었습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만, 신년 하례식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아 유감스럽습니다. 모든 것이 이장된 이 사람의 나태와 불찰의 결과입니다. 여러 어르신들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이장의 우울한 인사말이 길게 이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음식을 앞에 놓은 채 저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요. 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에 이따금씩 놀라 고개를 들 뿐이었습니다.

지난 동짓달부터 한내마을은 근심에 싸였습니다. 그 근심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점차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남달랐던 애향심은 마을이 생긴 이래 마침내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름까지만 해도 한내마을은 인근 마을들의 부러움을 살 만큼 이웃 정이 깊었습니다. 두레싸움에서 우승을 했을 때는 월드컵 축구 4강에 올랐을 때 보다 더 기뻤습니다. 두레싸움이란 ‘농자천하지대본’ 깃발을 단 커다란 깃대를 서로 부딪쳐 상대의 것을 부러뜨리는 경기였지요. 30년만의 우승이었습니다.

깃대가 크거나 단단하다고만 해서 이기는 경기는 아니었습니다. 두레에 참가한 마을 사람들이 사물놀이의 신나는 장단에 맞추어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상대의 허를 찔러야 하는, 그야말로 오랜 연습으로 이룩된 협동과 단결심이 아니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지요.

경쟁 마을들의 깃대를 차례로 부러뜨리고 우승을 차지한 날, 한내마을은 밤늦도록 요란한 꽹가리와 징과 북과 태평소 소리로 뒤덮였습니다.

오랫동안 허리병을 앓던 최고령 노인이 자릴 털고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기뻐했던 까닭은 사실 이미 예견된 또 다른 우승에 대한 은밀한 확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동짓달에 벌어질 소싸움 대회였지요.

마을이 생긴 이래 소싸움 경기에서는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크고 늠름해서 태백이라는 이름을 얻은 황소가 한내마을 사람들의 정성으로 자라고 있었던 겁니다. 경쟁 마을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태백은 아주 비밀리에 키워졌습니다.

태백의 성장과 전력(戰力)을 전담하는 책임자가 정해졌고, 제반 후원을 아끼지 않을 태백 관리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은 철저히 보안을 지켰습니다. 전통적으로 쌀농사 보다는 축산업에 주력해 왔던 지역이어서 주민들에게는 소싸움 대회가 볼거리 이상의 의미였지요. 소싸움에서 우승한 마을의 한 해 육우 출하량이 실제로 두 배나 오른 적도 있었으니까요.

아무도 태백의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태백은 특출했으니까요. 태백은 마침내 한내마을 사람들의 염원을 한 몸에 안고 동짓달 열 아흐레, 소싸움 대회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우승을 했습니다.

한여름 두레싸움에 이어 동짓달 소싸움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한 한내마을의 기쁨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태백의 소문은 세상 밖으로까지 알려져 아주 먼 지역의 신문과 방송에서도 다투어 취재를 해 갔습니다. 한내마을에서 사육되고 있는 다른 소들도 덩달아 신문이며 텔레비전에 건강하고 예쁜 얼굴을 비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신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지요.

그러나 한내마을의 기쁨은 열흘이 채 가질 못했습니다. 소싸움 대회본부로부터 태백의 우승이 돌연 취소되었다는 통보가 날아든 것이었습니다. 우승상금과 우승기도 곧 박탈한다는 소문이었지요. 날벼락 같은 소식에 온 마을 사람들은 의식공황 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넉삼이라는 풀을 먹였기 때문이었답니다. 넉삼은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자라는 콩과 식물의 다년초였습니다. 높이가 1㎙에 달하고 녹색이지만 어릴 때는 검은 빛이 도는 식물이지요. 건조시킨 뿌리를 달여 먹으면 황달이나 이뇨, 해열, 진통, 구충이나 진위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풀이었습니다. 성분은 알칼로이드인데, 이 풀을 소에게 먹이면 특별히 흥분작용을 일으키지요.

대회본부는 몇 년 전부터 소싸趾?출전하는 소에게 먹여서는 안 되는 물질들을 규정해 놓고 있었지요. 싸움소가 좋아하는 막걸리도 경기가 끝난 뒤에나 먹일 수 있었습니다.

축산 농가들의 과열 경쟁을 막고 가축의 건강과 건전한 대회운영을 위해 일종의 도핑테스트 제도를 도입했던 것입니다. 대회본부의 테스트 결과에 대해 한내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경쟁 마을들의 음모라고까지 주장하는 바람에 국가 수사기관이 개입했고, 마침내는 인근 마을들과의 오랜 선의와 믿음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수사기관의 조사도 금지 약물 투여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내마을 내부에서 갈등이 일기 시작했지요. 마을 사람들은 한때 열화와 같은 성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태백 전담자와 관리위원회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의심을 받게 되자 전담자와 관리위원회 간에도 책임 떠넘기기 공방이 벌어졌지요. 날이 새면 새로운 소문이 나돌고 의심은 꼬리를 물었습니다. 기쁨으로 가득 찼던 한내마을은 어느새 서로간의 불신과 분노, 흥분과 적으로 가득해 춥고 우울한 한해의 끝을 보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신년 하례식을 참담한 분위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이장의 길고 음울한 인사말이 끝나자 회관 후문께에 앉아 있던 태백 전담자가 슬며시 일어섰습니다. 그의 눈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그가 말했지요.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출전 이틀 전부터 태백이한테 넉삼을 먹였습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마을을 떠나겠습니다.”

회관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지요.

그러자 관리위원 한 명이 벌떡 일어났지요.

“아닙니다. 넉삼 얘기를 전담자한테 은밀히 건넸던 건 저였습니다. 처음으로 우리 마을이 우승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이번에는 어린 남자 초등학생 하나가 일어서서 뒷머리를 긁었습니다.

“넉삼 먹이는 걸 봤어요. 하지만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거든요. 태백이가 이기는 걸 보고 싶어서….”

여기저기서 다투어 손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마다 하고 싶은 말들이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러자 맨 앞 자리에 앉아 있던 백세의 노인이 불편한 허리를 펴며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회관 안은 일순 조용해졌습니다.

“되었소이다, 되었어. 우리 모두의 불찰이었어. 지나친 기대가 욕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양심의 소리를 애써 외면했던 게야. 그런 식으로 소가 자라고 일등을 하면 뭐하겠소. 마을이 이렇게 망가져 가는 것을. 쉽게 흥분하고 들뜬 것도 잘못이요, 조급해서 규정을 어겼던 것도 잘못이지만, 더 큰 잘못은 너나없이 남에게만 잘못을 떠넘기려 했던 것이외다.

그게 몹시도 걱정이 되어 백 살을 착잡한 심정으로 맞았소만, 사태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여러분 스스로 잘 아는 걸 보니 무겁던 맘이 가벼워지외다…. 되었어요. 이제 허리도 가벼워졌어. 좀 더 살맛이 생겼어요. 이제 우리 제대로 된 꿈과 희망을 갖고 진짜 일등소 한 번 만들어 봅시다.”

노인의 말이 끝나자 꼬마 여자 아이가 말했습니다.

“그럼 이제 떡 먹어도 되나요?”

한내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번졌습니다. 난로 속 장작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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