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의 연극은 눈처럼 모든 것을 감싼다. 동화의 세계도, 어른들의 팍팍한 삶도 거기 있다.
박정자(54). 백상예술대상만 4차례 수상한, 한국 연극의 상징이 되다시피 한 그가 다시 팔순의 노파로 분한다. 어쩌면 그의 이름으로 평생을 함께 할 무대다.
PMC 프로덕션의 ‘19 그리고 80’은 노파 박정자와 열 아홉 살 청년의 짜릿한 사랑 이야기다. 삶에 염증이 난 19세 소년과 유쾌한 팔순 할머니가 이뤄내는, 삶의 시너지 효과에 대한 이야기다. 심심하면 자살 소동을 벌이는 소년(해롤드)과 엉뚱하면서도 즐거운, 그러나 죽음을 코앞에 둔 노파(모드) 사이에 싹트는 교감이 큰 줄기다.
노파와 지내면서 삶의 가치에 눈 뜨게 된 소년은 구애하기로 작정한다. 그래서 노파의 80세 생일날, 소년은 결혼 반지를 준비해 파티를 준비한다. 그러나 모드는 오래 전부터 계획한 대로 죽음을 맞기 위해 약을 먹은 상태였다. 박정자는 지난해 4월 가족 연극 ‘우당탕탕 할머니의 방’에서도 가는 귀가 먹은 우스꽝스런 노파 역을 소화하는 등 나이 듦의 의미를 차분하게 새겨내고 있다.
소년역의 윤태웅(25)은 연극무대에서는 생소하지만 이름 만으로는 일찌감치 국민스타다. 88서울올림픽 당시, 7세 나이의 굴렁쇠 소년으로 나았던 그 주인공이다. 해병대를 다녀와 지난해 9월 해롤드의 적역을 찾는 공개 오디션에서 200여명의 경쟁자를 제쳤다. 콜린 히긴스 작, 강영걸 연출. 9~2월 19일까지 우림청담씨어터. 화 오후 7시 30분, 수 3시 7시 30분, 목ㆍ금 7시 30분, 토 3시 7시 30분, 일 3시 (02)762-0810
동화 같은 아련한 느낌을 주기에는 서울시극단의 ‘할아버지의 보물 창고’ 역시 못지않을 것 같다. 심술 8단에 심통 9단, 합해서 17단이라는 괴팍한 고물상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노른자위 땅에 버티고 선 고물상의 재개발로 이익을 보려는 동네 불량배의 행패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할아버지에게 고물 깡통로봇이 나타나 불량배들을 물리친다.
일상에서 버려지는 물건들이 할아버지의 손을 통해 거듭나는 과정이 즐겁다. 텔레비전으로 만든 침대, 서랍을 단 냉장고, 식탁으로 쓰는 자동차 트렁크 등 할아버지가 만들어 내는 재활용품의 세계가 동화 같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무대를 기획하는 과정부터 동화 작가 참여, 무대에 맞게 내용을 수정해 간 작업 과정도 화제가 됐다. 서울시극단원들의 무르익은 연기와 아역 배우들의 풋풋함이 어우러진다. 위기훈 작, 최용훈 연출. 22일까지 세종문화회관소극장. 매일 오후 2시 5시. (02)396-5005
“왜 하필이면 나같이 묵은 여자를 찾는디요?” 1995년 초연돼 2년 동안 전국 20개 도시를 순회한 양희경의 ‘늙은 창녀의 노래’가 다시 대학로를 찾는다. 전라도 말을 징글맞게 구사하는 중견 작가 송기원의 ‘뒷골목 기행’을 원작으로 삼아, 무대는 삽시간에 남도로 공간 이동한다.
두 평 남짓한 방, 흐릿한 전등불 밑, 목포의 뒷골목 쪽방에서 몸을 파는 늙은 창녀가 마흔한 살 동갑내기 손님을 만나 한 잔 술에 풀어 놓는 20년 한(恨)이다. 극이 진행되면서, 그녀는 어느새 지친 마음을 채워주는 여인으로 둔갑해 간다. 진흙탕 같은 현실속에서 열여덟의 순수를 잊어 버리지 않은 그녀는 어쩌면 우리 마음속의 고향일 터이다. “손님 모냥 허한 마음 채워주고 싶어라우.” 최성신 연출. 25일까지 학전 블루 소극장. 화~금 오후 7시 30분, 수ㆍ토 4시 7시 30분, (02)762-9190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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