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옷 업체에 근무하는 이희경(35ㆍ비비안 디스플레이팀장)씨는 8년째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지만 결혼은 아직 관심 밖이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대전의 갤러리아 백화점(구 동양 백화점)에 근무하다 현 직장으로 옮긴 지 6년째.
3명의 직원과 함께 전국 250개 비비안 매장의 디스플레이를 총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 느닷없는 야근 지시에 두 말 않고 저녁 데이트 약속을 취소하는 맹렬 여성이기도 하다.
“입사 초기엔 팀장만 되도 좋겠다 싶었는데 할수록 욕심이 생긴다”는 이씨. “좋아하는 일 하면서 능력을 인정 받을 수 있어 만족스럽다. 애인도 있고 좋아하는 일도 있는데, 결혼이라는 복잡한 제도안으로 굳이 들어갈 필요를 못 느낀다”고 말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독신 여성 비율도 급격히 늘고 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00년 국내 독신 여성(20~49세, 사별ㆍ이혼 포함) 비율은 29.3%에 이른다. 결혼, 출산, 가사라는 전통적 역할 모델을 벗어나 사회적 성취와 자유를 원하는 여성이 그 만큼 늘었다는 증거다.
독신으로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치고 있는 여성들은 “1980~90년대가 가정과 일 모두 지키려고 안간힘을 쏟던 슈퍼 우먼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는 콘트라섹슈얼의 시대”라고 말한다. 콘트라섹슈얼이란 사회적 성공과 경제적 여유를 중시, 결혼이나 양육은 선택 사항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대기업 홍보 이사로 근무중인 손자경(42ㆍ가명)씨도 ‘내가 주인인 삶’을 위해 결혼을 포기했다. 잡지사 기자로 일하던 시절, 비교적 늦은 나이인 34세에 미국 유학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독신이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손씨는 “결혼도 일종의 조직 생활이라 아무래도 남편이나 양가 어른들 눈치를 봐야 하지만 독신은 혼자만 결정하면 그만이다.
그만큼 몸이 가볍고 자기 개발이나 일에 대한 몰입도가 높을 수 밖에 없다”고 전제, “일과 결혼을 조화롭게 양립시킬 수 있는 행복한 여성들도 있겠지만 현실은 누구에게나 24 시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육아나 가사를 위한 시간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철인 2종경기 주자처럼 살겠다는 생각을 아예 접었죠.”
IMF 이후 경제 활동 여성 인구가 늘고 만혼 풍조가 자리잡으면서 독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개선됨에 따라, 독신은 진지한 고려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광고 회사 AE로 12년째 근무하는 이숙희(36ㆍLG애드 부장)씨는 “‘독신’이라는 말에 이상한 뉘앙스가 섞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엔 오히려 직장에서 결혼한 여성을 부담스러워 한다”고 말한다.
“독신여성이 워낙 늘어난 데다 직장내 남녀 차별이 거의 없어진 상태에서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야근과 철야 작업을 소화해야 하는 광고계의 특성상, 가정일에 매이지 않는 독신 여직원이 선호되는 분위기”라는 귀띔.
이씨는 독신만 따로 떼 내 두드러져 보일 필요는 없음을 강조한다. 그는 “일, 사회적 봉사, 내면의 평화 등과 더불어 그것은 내 인생의 일부분일 뿐”이라면서 “일이 사회적 성취나 밥벌이를 위한 남녀 모두의 필수 사항이라면, 결혼은 정말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상대를 만날 때까지 유보해도 좋은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비교적 운신이 자유롭고 직장 생활에 몰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장점으로 꼽히긴 하지만, 독신 직장 여성에게는 그만큼의 부하도 따른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고위층일수록 가족 모임을 통한 네트워킹이 잦아지는 것은 단연 대표적인 사례다.
외국계 금융 컨설팅 회사에서 마케팅 이사로 일하는 정은희(39ㆍ가명)씨는 “서로 속을 터놓을 만큼 신뢰하는 보스 조차도 부부 동반 모임에는 나를 부르지 않더라”면서 “그런 네트워킹 기회 때마다 남자 친구들을 끌고 다녔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한다.
손자경씨는 “국내에서는 세재 혜택이나 직장내 사원 복지 등이 대부분 결혼한 커플을 전제로 마련돼 있기 때문에 독신 여성이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곱절의 노력이 든다”면서 “노후를 대비한 재테크, 인맥 관리, 직장 밖의 사회적 관계망 형성 등 다양한 형태로 끈을 맺어두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자유롭되 외롭지 않고 풍성한 삶을 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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