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미집 / 김두안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 해본다 그는 간간히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떼 돌돌 말아 던져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 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엮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 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 입가에 물집처럼 / 달이 뜬다
해도 지기 전에 뜬다
나는 어둠이 보고 싶어
내 어두움도 보일 것 같아서
부두에 앉아 있는데
달이 활짝 뜬다
달빛은 심장을 욱신거리게 하고
희번득 희번득 부두에 달라붙고 있다
아 벌리다 찢어진 입가에 물집처럼
달빛은 진물로 번지고 있다
달은 어둠을 뻘밭에 번들번들 처바르고 있다
저 달은 환하고도
아찔한 내 안에 근심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초병에게 쫓겨가는
통제구역인 것 같아서
나는 캄캄한 나를
어떻게든 더 견뎌 보기로 한다
■ 詩 부문 심사평
심사위원들이 골라 온 작품은 모두 11편이었다.
응모된 전체 작품 수를 고려하면 뜻밖에도 너무 적은 양이었다. 그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의 시 부문 심사절차가 지닌 독특성이 고려되어야 할 듯하다. 즉 예심위원이 본심을 겸하는 만큼 아예 예심 단계에서부터 본심에 임하는 각오로 작품을 선별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어쨌든 11편을 두고 예심을 치러 아쉽지만 6편을 탈락시켰다.
이여명의 ‘돌을 쪼다’정철웅의 ‘철거민’이유훈의 ‘저수지에서 경전을 읽다’조인호의 ‘알라딘과 코카콜라의 요정’이연희의 ‘장독하나 묻어두고’김두루의 ‘얼룩말’이 그 작품들이다.
본심에 오른 작품 가운데 박희진의 ‘햇쑥’은 인고의 계절을 딛고 선 초봄의 여린 햇살처럼 따스하고도 빛나는 서정성이 돋보였으나 작품을 구조적으로 맵시 있게 갈무리하는 솜씨가 다소 서툴러 보였고, 또 소품에 그치고 만 것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정지현의 ‘직선의 방정식의 일반형’은 곧고도 날렵한 음조를 지닌 의욕적인 목소리와 능란한 은유의 구사가 매력적이었지만, 아직은 저 수사가 소리의 의욕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 듯했다.
작품의 제목을 정하는 데에도 보다 오랜 고민과 세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드린다. 배호남의 ‘고래꿈’은 구조적으로 매우 안정된 작품이어서 오랜 습작과 훈련의 세월을 읽게 만들었다. 그 점은 함께 출품된 ‘사군자의 꿈’ 같은 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 한 편만을 뽑을 수밖에 없는 심사위원들의 처지에서는 그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부족해보였다.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오선희의 ‘꽁치’로서, 구조적 완결성에 있어서 발군의 솜씨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실직 가장의 죽음과 구운 꽁치의 이미지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삶의 엄숙함과 핍진함을 형상화한 이 작품이 당선작이 되지 못한 데에는 그러므로 순전히 운명의 여신의 장난이 작용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실망하지 말고 계속 정진하시길 각별히 당부 드린다.
당선작인 김두안의 ‘거미집’은 어떠한 과장된 수사나 현란한 말재간도 사양한 채, 차라리 어눌할 정도로 느껴지는 작고도 여린 목소리로 이 삶과 존재의 미세한 결을 한 땀 한 땀 정직하게 발음해내는 섬세한 내면 감각이 단연 돋보였다. 세상의 말들이 제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시대에 시의 언어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기회가 되었다.
함께 제출된 ‘입가에 물집처럼’도 저 우직할 정도의 정직성을 높게 사 아울러 당선작으로 뽑는다.
심사위원= 김기택, 황인숙, 김진수
■ 詩 부문 당선 김두안 인터뷰
전남 신안군 임자면 임자도(荏子島).
섬 소년은 문둥이가 산다던 배미골 너머 바다와 나란히 뻗은 20리 산길을 달려 마방촌 큰 아버지댁에 심부름을 다니곤 했다. 늦봄이면 외진 해변마다 피어나던 찔레꽃무리, 그 그늘에 앉아 바라보던 바다를 그는 기억한다고 했다. 5학년 때 그의 어린 동생이 숨진다. 뭍의 병원에서 석 달을 버티다 식어버린 동생을 포대기에 싸 업고 배에서 내린 엄마를 따라 걷던 조금사리의 갯벌둑…, 하얀 간(흙의 소금기)에 반사되던 그 날의 노을과, 엄마의 병원 냄새를 그는 기억한다고 했다.
20대의 그는 고향의 김 양식장과 염전을 등지고 상경해서는 공장 일을 했고, 운 좋게 장가를 들었고, 잠시 낙향했다가 다시 올라와 경기 김포에 눌러앉는다. “섬이 싫어 찾아온 도시지만 이 곳도 섬과 다를 바 없더군요. 김포는 그래도 바다와 들판이 있어 좋았어요.”
빈 들녘의 허전함과 고요가 좋다는 그는 그 날 이래 지금껏, 한 해 최다 여섯 켤레의 구두를 작살낸 보험맨으로 살아왔다. 5년여 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박탈감과 허전함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했다.
“김포시가 연 ‘시민강좌’에서 함민복 시인을 만났어요. 그가 시인이라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죠.” 배워서 된 시인이 아니라, 겪어서 된 시인인 그는 그래서 유년의 바다와 염전, 김포 공단을 떠돌 때에도 이미 시인이었을 것이다. “유년의 추억과 가족, 자연, 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의 삶을 잇는 시간과 공간 속의 길처럼 늘 그 사이에 있고 싶습니다.”
그런 그의 당선 소식에, 한 번 미치면 끝장을 보려 드는 그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의 아내는, “갑갑하다”고 했다고 한다.
■ 김두안 詩부문 당선소감
늦은 저녁 전화 한 통이 걸려오고 머리 속에 달 하나 뜬다
뻘밭에 김 말뚝을 다 세우고 아버지와 나는 배를 밀어낸다 갯벌에 종아리를 박고 등으로 민다 섬 사이에 닻을 내린다 깍두기 국물에 밥을 말아먹고 낚시줄을 던진다 환한 수면이 잔잔히 밀려오기 시작한다 달 속에 수수깡찌가 보인다 낚싯대가 휘어진다 배가 출렁거리고 달빛이 끈길 것 같이 팽팽하다 아버지의 가시등이 휘어오른다 달이 뽑힌다 팔뚝만한 농어가 꿈벅꿈벅 아가미를 벌리고 허공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고향 섬 임자도를 떠나온 지 오래 되었습니다. 습관처럼 김포 들녘을 걷습니다. 별똥이 논둑으로 사라지고 군데군데 남아있는 눈이 은하수처럼 반짝입니다.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기러기 한 무리 소리없이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겨드랑이에 바람이 스밉니다. 나는 좁고 판판한 들길이 절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절벽을 기어오르는 희미한 달그림자를 봅니다. 나는 어딘가에 내 그림자 하나 버리러 갑니다. 아버지와 눈빛도 없이 살아가는 어머니 얼굴이 보입니다. 저에게 힘든 길을 안겨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그리고 한국일보에 깊은 감사 드립니다. 김포 지인들에게도 오래 고개 숙입니다.
▦ 김두안(金斗安) 1965년2월 전남 신안군 임자도 출생. 임자중- 목포 영흥고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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