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국일보 송년 콩트/ 월계동 비분강개 삼인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국일보 송년 콩트/ 월계동 비분강개 삼인조

입력
2005.12.30 00:00
0 0

말 많고 탈 많았던 2005년도 어느덧 끝줄이다. 송구영신의 바람으로, 신예 소설가 이기호씨의 콩트를 싣는다. 이씨는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2003년 대산창작기금을 받은 작가다.

그는 지난 해 첫 작품집 '최순덕 성령충만기'(문학과지성사)로 만만찮은 입담과 이야기꾼으로서의 드문 면모를 과시한 바 있다. 1972년 강원 원주에서 나서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현재 명지대 문창과 대학원(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냔 말이야, 내 말은!”

얼씨구. 또 시작한다, 시작해. 저 인간들은 한 해를 화로 시작해서 화로 끝내는구나. 어쩜 저럴까. 지들이 무슨 남산 위에 푸른 소나무라고 저렇게 한결같을 수 있을까? 소나무들도 재선충 때문에 색이 바랜다고 난리인데, 아아, 저 변치 않는 목소리들이란.

내가 우리동네 곱창집 ‘전봇대’에서 저녁 파트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은 올해 1월 1일부터였다. 뭐 이제 나도 어엿한 스무 살이 되었고, 더 이상 부모님에게 용돈 받기도 쑥스럽고, 125cc 때깔 좋은 오토바이도 사고 싶고, 뭐 그렇게 겸사겸사 굳은 다짐과 희망으로 시작한 아르바이트였다.

사실 곱창집 아르바이트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동네가 워낙 서울 변두리여서 그런지 손님도 거의 없었다. 하루 저녁 한두 테이블 오는 손님들도 대부분 안면 있는 동네 사람들이었다. 서로 인사하고 지내는 지역 인사들. 물도 자기들이 떠 마시고, 소금이나 청양고추 떨어지면 알아서 주방을 뒤지는 그런 사이들. 사실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기도 조금 미안한, 벼룩시장에 일 년 넘게 매물로 나와 있는, 한숨만 팍팍 나오는 가게였다. 그러니 몸은 편했으되 시간은 더디게 가는, 그런 일 년을 지낸 셈이었다.

한데, 언제나 문제는 지금 저기, 식당 정 중앙 원형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저 세 명의 인간들, 저 세 명의 ‘비분강개파’ 때문에 시작되었다. 사진관을 하는 정씨와, 문구점을 하는 최씨, 기원을 운영하는 박씨, 이름하여 월계동 비분강개 삼인조. 곱창집을 마을 회관 삼아 억병으로 취하는 것을 주중 행사로 여기는 위인들.

내가 저 삼인조에게 올 한 해 동안 당한 봉변만 해도 열 번은 넘는 것 같다. 뭐 봉변을 당할 정당한 사유라도 있었다면 덜 억울할 텐데, 허, 거참, 되돌아보면 볼수록 말도 안 되는 이유들 때문이었다.

GP 총기난사·X파일·기생충 김치…

일 터질 때마다 술 취해 알바생인 나를 1년 내내 갖고 놀던 세 위인들…

6월인가, 전방 GP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터졌을 때만 해도 그렇다. 뭐 자기들끼리 울분을 토하고, 목소리를 높이고, 분단 상황에 대해서 논하고, 다 좋단 말이다. 한데, 왜 애꿎은 나에게까지 화살을 쏘냔 말이다.

“너, 임마. 군대 갔다 왔어?”

사진관 정씨가 불콰해진 얼굴로 내게 물으면, 그게 출발 신호인 양 모두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요, 아직 신검도 안 받았는데요.”

“이 자식, 이거 이거 괜히 면제 받으려고 용쓰는 거 아니야!”

그렇게 정씨가 서브를 때리면, 다시 최씨가 애가 어딘지 모르게 심약해 보인다고, 그게 다 고등학교에 교련이 없어져서 그렇다고 살짝 토스를 해주고, 그런 다음 박씨가 이게 다 인터넷 때문이라고, 인터넷으로 바둑들 두고 방에만 처박혀 있어서 그런 것이라며, 말도 안 되는 스파이크를 날린다. 그리고 나선 원형 테이블을 팡팡, 두들겨대며 군가를 고래고래 부르다가(나도 옆에 서서 따라 부르라고 시킨다), 그것도 지겨워지면 거의 낮은 포복 자세로 곱창집을 나가곤 했다. 그들이 나간 곱창집은 마치 방금 수류탄이라도 터진 듯 어수선했고, 나는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그들이 떠난 테이블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렇게 그들이 버린 담배 꽁초와 청양 고추를 치우고 있자면 때늦은 화가 치밀어 올라 빗자루를 든 손이 부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네가 참아라. 저렇게 스트레스 푸는 게 낙인 사람들이니까.”

마음 좋은 곱창집 사장님이 그렇게 위로를 했지만, 사실 나는 그게 잘 위로가 안 되었다.

가을엔 또 안기부 X파일 때문에 한 차례 사단이 나기도 했다. 자신이 ‘대마’로 믿고 지지했던 국민의 정부가 그럴 리 없다고 박씨가 신호탄을 쏴 올리고, 다시 정씨가 그래서 자기 사진관은 삼성 카메라는 안 쓴다며 자신의 대쪽 이미지를 자랑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쩌다 최씨의 입에서 자기도 요새 누군가에게 도청 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신빙성 제로에 가까운 말이 떨어지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그러더니 또 예의 그 술 취한 목소리로 젊은 놈이 항상 우리 술자리 옆에 있는 것이 수상하다, 네 휴대폰 좀 보자, 녹음 기능이 되는 거 아니냐, 우리가 늘 반정부적인 언사만 늘어 놓으니 드디어 국정원에서 손을 쓰는구나, 하며 내 휴대폰을 강제로 뺏으려 들었다. 내가 필사적으로 저항해서 겨우 휴대폰을 뺏기지는 않았지만, 그 바람에 난 정말 확실한 국정원의 ‘끄나풀’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마지막엔 어쩌면 이게 다 대통령 귀에 도청 장치가 달려 있어서 그런 거라는, 거의 SF에 가까운 결론을 내린 후 또 다시 원형 테이블을 팡팡, 친 후 돌아갔다.

내가 곱창들을 들어올리는 순간

"곱창은 안굽고 바꿔치기나 해! 이거 곱창집의 음모 아니야…"

청계천이 개통되었을 때도, 중국산 김치 파동을 겪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풍수지리학상 서울에 개천이 나서 물이 흐르면 안 좋다, 거기에 쓸 돈으로 디카 때문에 망해가는 사진관들이나 도와주지 뭐 하는 짓이냐, 기원은 더 죽을 맛이다, 애들이 청계천 놀러 가는 바람에 바둑을 더 안 둔다, 야, 아르바이트, 너도 괜히 청계천에 가서 본드나 부는 거 아니냐, 팡팡팡…. 이거 기생충 김치 아니냐, 야, 아르바이트, 불안하니 네가 먼저 맛을 보거라, 왜 안 먹는 거냐, 너 혹시 중국인 아니냐, 팡팡팡….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자기들과 하나씩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 그들 때문에, 나는 몇 번이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려 했었다. 그러나…. 에이, 그래도 같은 동네 사람들인데…, 조금만 더 하면 125cc 오토바이가 내 건데…, 하는 마음 때문에.

“이게 줄기 세포냐 아니냐, 원천 기술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문젠데….”

그리고 돌아온 세밑, 그들은 오늘까지도 나라의 흥망성쇠와 사회 이슈에 대해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었다. 한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말들이 별로 없다. 정씨만 반짝 소리를 지르고 말았을 뿐이었다. 이 때쯤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황우석 교수 사태에 대해 목청을 높이다가, 다시 나를 붙잡고, 네가 정말 진정한 네가 맞냐, 너 혹시 복제된 놈 아니냐, 하고 억장 무너지는 소리를 했어야 정상인데….

“난 말이야, 이번 건 아무리 신문을 봐도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더라고….”

“거, 테, 테라토마인지 텔레토비인지, 누가 좀 알아?”

아하, 저거구나. 정말 아무것도 모르니, 화도 못 내는 거구나. 오호, 그렇담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겠구나. 아무렴, 그래야지. 연말인데 뭐 좀 변하는 맛이 있어야지. 나는 좀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의 철판을 갈아주기 위해서 다가갔다. 그들은 연신 소주만 마실 뿐 좀처럼 철판 위 곱창들은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나는 능숙한 집게질로 철판 위에서 타고 있던 돼지 곱창들을 하나하나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최씨가 집게를 들고 있던 내 손목을 잡았다.

“이 자식, 이거, 어디서 바꿔치기를 하려고!”

나는 예상치 못한 최씨의 말에 당황했고,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멀뚱멀뚱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어서 연달아 터져 나오는 정씨와 박씨의 말. 이런 게 바로 바꿔치기란 말이지, 이 자식, 이거 구우라는 곱창은 안 굽고 바꿔치기나 해! 이거 이 곱창집의 음모 아니야….

아아, 세밑이라고 해서 우리의 월계동 비분강개 삼인조가 가만있으랴. 모르면 어떠랴, 모른다고 스트레스를 못 풀까 보냐. 나는 거의 포기한 심정으로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들은 이제 혹시 네 이름이 영롱이 아니냐는, 소가 들어도 화낼 말만 골라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