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방콕의 소녀 부(Buㆍ17)는 요즘 학교 수업이 끝나면 국립 경기장으로 직행한다. 두달 전 가입한 ‘동방신기’ 팬 클럽의 친구들을 만나 춤과 노래를 연습하기 위해서다. “한국에 가보는 것과 ‘동방신기’를 직접 만나는 게 꿈”이라는 부는 “한국 음악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감성을 밖으로 이끌어 준다”고 했다.
태국에는 회원 수가 2,000명에 달하는 ‘동방신기’ 팬 클럽 외에도 비와 세븐, 베이비 복스 등의 팬 클럽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일본 후쿠시마현의 요리 강사이자 한일 문화 교류 단체인 ‘후쿠시마 네트워크’의 회원인 시마다 마에코(50)씨는 최근 한국 음식의 세계에 푹 빠져 있다. 잡채와 보쌈은 물론 떡볶이까지 그럴듯하게 만들 줄 아는 그녀는 “최근 NHK가 방송하고 있는 ‘대장금’이 인기를 끌면서 정통 한국요리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고 했다.
중국에서도 명문대로 손꼽히는 베이징항공항천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인 쉬싸(徐颯ㆍ24)는 한 달 전부터 베이징 한국문화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그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보고 전지현에게 반한 뒤부터 합한족(哈韓族: 한국 대중 문화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을 일컫는 말)이 됐다.
쉬싸는 중국 내 배우들과 제작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반한론’에 대해 “중국 드라마와 영화는 한국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잘라 말했다.
한류는 있다. 한국 드라마의 열기가 음식과 언어 등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전이되고 있다. 대만과 홍콩을 지나 일본과 중국 대륙을 강타한 ‘대장금’ 바람이 베트남과 태국을 거쳐 멀리 중동까지 퍼져가고, 아시아 전역에서 가수 비의 인기도 소나기처럼 거세다.
한국에서 방영이 막 끝난 최신작 드라마 DVD들은 중국과 일본, 태국, 베트남의 DVD 가게를 점령하고 있다. 베이징이나 상해에서는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한 젊은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한류는 없다. 한류는 미디어의 세계화 현상에 힘입어 아시아의 문화적 통합현상이 낳은 일시적 유행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냉소가 안팎에서 나온다. 중국 칭화대 문화산업연구원의 판홍(范紅) 교수는 “지금의 한류는 일시적이고 표면적 현상에 그치고 있다”며 “아주 얕은 물인 한류를 한국 고급문화가 흐르는 깊이 있는 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국이 한류를 넘어 아시아 문화허브를 지향해야 하는 까닭이다.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젊은이와 여성 등 일부 계층에서만 유행하고 있는 한류의 폭과 깊이를 더욱 넓혀 아시아의 대표 문화로 업그레이드하고 한국이 그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전통문화 및 고급문화, 심지어 한국적 라이프스타일까지 포함하는 한국적 문화모델이 만들어져야 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윤순봉 부사장은 19세기 일본문화를 세계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자포니즘(Japonism)’의 성공전략을 벤치마킹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자포니즘이란 일본의 도자기가 유럽에 선보이고, 일본식 회화인 우키요에가 고흐 마네 같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을 사로잡으면서 형성된 ‘일본풍’을 의미하는 데 오늘날 서양인사이에 일본문화가 동양을 대변하는 고급문화로 인식되는 계기가 됐다.
윤 부사장은 따라서 일시적 유행을 의미하는 한류 대신 한국문화 전체로 그 개념을 확장시킨 ‘꼬레아니즘’이란 말을 쓸 것을 제안했다.
아시아 문화허브로서 한국의 잠재력은 외국에서도 인정 받고 있다. 중국의 드라마 제작사인 도원커뮤니케이션의 도정진(陶靜珍) 대표는 “최근 몇 년 새 문화 콘텐츠 분야에 있어서 급격하게 발전한 한국은 아시아의 문화 허브뿐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의 문화에 대항할 수 있는 세계 문화허브도 가능하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한국이 문화허브로 나가는 데 최대 장애물은 우리의 인식 부족과 문화를 보는 편협성이라고 지적한다. 한류를 보는 시각 자체가 우리 문화의 우월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에 그치고 문화 수출에 따른 경제적 이득을 챙기려는데 만 급급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미 중국과 일본 등에서 한류를 경계하거나 견제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이유이다.
문화허브는 문화 생산을 독점하는 곳이 아니라 각국의 문화가 소통하고 뒤섞이는 교차로를 의미한다. 따라서 문화허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문화를 강요하는 폐쇄성을 버리고 아시아의 각국 문화를 폭넓게 수용해 아시아인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 상품으로 녹여내는 문화적 용광로가 되어야 한다.
중앙대 한류 아카데미 강철근 원장은 “문화허브의 전제조건은 무조건 우리 문화 상품만을 팔겠다는 일방적이고 문화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아시아 문화를 기꺼이 수용하고 교류할 수 있는 마인드를 갖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 "日流의 실패에서 배워라"
“아시아에서 우리 콘텐츠가 언제까지 인기를 누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회의적이다. 가까운 미래에 현지 상품이 재빠르게 우리 콘텐츠를 제칠 수 있기 때문이다.”
1994년 일본 최대 광고 회사인 덴츠가 일본 정부에 제출한 ‘아시아 시장의 영상 소프트웨어 수출 진흥에 관한 보고서’의 내용이다. 한류를 지속 가능한 문화현상으로 정착시키려는 요즘 한국의 고민과 신기할 정도로 일치한다.
지금 한류는 10년 전 ‘일류(日流)’와 판박이다. 대만과 홍콩의 팬들은 아무로 나미에에 열광했고 ‘도쿄 러브 스토리’ ‘101번째 프로포즈’ 같은 일본 드라마를 즐겼다. 또 일본 언론들은 이 같은 현상에 주목하며 ‘아시아에서 지금 일본이 뜨고 있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일류 지속을 위해 현지화 전략도 꾀했다. 후지 TV는 1992년 일본,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태국, 대만 등이 참여해 스타를 발굴하는 프로그램인 ‘아시아 버거스!’를 기획했고 대형 기획사인 호리 프로덕션은 홍콩과 베이징, 베트남에서 오디션을 실시했다. 공동 제작과 현지 상품의 제작 등 지금 한류의 확산을 위한 과제로 여기고 있는 기획들을 이미 실행에 옮긴 것.
그럼에도 일류는 한류에게 자리를 내줘야만 했다. 여기에는 우수한 콘텐츠의 고갈이라는 1차 요인 이외에도 여러 가지 점들이 작용했다. 아시아 각국이 일본에 역사적으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대중문화의 유행은 또 다른 문화 제국주의로 비쳐졌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벽을 결국 넘어서지 못했다.
미국 문화의 아시아적 수용이란 장점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빠르게 미국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빛이 바랬다. 일본 대중문화 콘텐츠의 가격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은 점과 엄격한 저작권 보호로 콘텐츠의 다양한 공유가 이뤄지지 못한 점도 한계로 작용했다.
오늘날 한류의 초상도 이와 다르지 않다. 후진타오 주석이 문화산업 육성론을 들고 나오면서 중국 정부는 2006년부터 한국 드라마의 수입량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CCTV는 지난달 21일부터 외국 드라마 방영 시간대에 한국 드라마 대신 미국의 ‘위기의 주부들’을 내보내고 있다. 콘텐츠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실제 태국의 경우 한국 드라마 가격은 최근 2년 새 10배 가까이 뛰었다.
한류는 ‘미디어의 전지구화’라는 대지 위에 일류가 닦아 놓은 문화 고속도로를 타고 질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언제라도 다른 나라의 대중 문화가 달릴 수 있다. 일류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
김대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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