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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신년특집-신춘문예/ 한국일보 소설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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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신년특집-신춘문예/ 한국일보 소설 당선작

입력
2005.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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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팅룸 앞에 선다. 문에 붙어있는 전신거울은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다. 거울 앞으로 바짝 다가선다. 새로 산 오렌지색 아이섀도는 펄이 너무 많이 섞인 것이 흠이다. 펄감이 짙으면 입고 있는 옷보다 반짝이는 두 눈에 고객들의 시선이 집중되기 때문에 늘 조심해야 한다. 파우치백을 열어 브러시를 꺼내든다. 브러시로 눈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가볍게 쓸어 낸다. 두어 걸음 물러선다. 펄이 조금 가신 듯했지만 여전히 눈화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제 나는 세 번, 옷을 갈아입었다. 오전에 입었던 샘플옷은 열네 장 모두 두 시간여 만에 팔려나갔다. 가슴선이 깊게 패인 두 번째 샘플옷은 44사이즈가 먼저 팔렸다. 작은 사이즈가 먼저 팔리는 일은 흔치 않았기에 나는 다소 들떠 있었다. 세 번째 샘플옷으로 갈아입은 때가 오후 세 시쯤이었다.

백화점 폐점 시간이 되었을 때 그 옷은 내가 입고 있는 것을 포함해 단 석 장만 남았다. 완판의 기록을 코앞에 두고 마감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샵마스터는 내심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바비보다 먼저 새 옷을 골라 입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마저 설쳐가며 오늘 화장을 계획했다.

거울을 통해 계산대 쪽을 바라본다. 샵마스터는 계산대 위에 올려놓은 옷들을 살펴보느라 부산스럽다. 어제 내가 눈여겨두었던, 연둣빛 쉬폰블라우스는 여러 벌의 옷들 중 단연 눈에 띈다. 다른 어떤 옷들보다 많은 양이 들어온 것을 보면 판매주력상품이 분명하다.

바비가 매장 안으로 들어온다. 화장기 없는 얼굴 위에 어제의 고단함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바비는 샵마스터에 목례를 하고 난 후 계산대 옆에 쭈그려 앉아 아래 서랍에 핸드백을 집어넣는다. 나는, 바비를 내려다보는 샵마스터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바비는 며칠 째 똑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윗부분은 과하다 싶을 만큼 부풀리고 뒤통수를 따라 머리칼을 하나로 땋아 내렸다. 새로 들어온 어떤 옷과도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이다. 샵마스터의 말처럼 정말 바비의 카리스마는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바비는 카리스마스탭 6기다. 그녀가 뽑힐 당시 공채 이래 가장 높은 경쟁률이었다는 입소문을 나는 기억한다. 174센티미터의 키에 44사이즈를 소화해낼 수 있는 그녀는 카리스마스탭으로 뽑힌 네 명중 단연 돋보였다고 한다. 여성의 신체곡선을 강조한 회사의 브랜드 이미지에 가장 걸맞는 몸매를 지녔다는 찬사가 뒤따랐다.

사람들은 그녀가 회사 본점의 매장으로 발령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열 두 개의 매장 중 매출이 가장 낮은 곳으로 첫 출근했다. 그녀를 처음 본 매장의 스탭들은 바비인형을 떠올렸다. 그녀는 김주연이라는 이름 대신 바비라고 불렸다.

처음, 스탭들은 바비의 완벽한 모습에 고객들이 주눅 들거나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비는 하루에 네 번씩 각각 다른 샘플옷을 입었다. 갈아입기 무섭게 바비가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옷들이 팔려나갔다. 바비는 당일 매출로는 최고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는 즐거운 비명이 그 매장으로부터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고객들은 바비를 보기 위해서라도 매장을 찾았다. 두 달 뒤 그 매장은 매출실적이 가장 높은 곳으로 급부상했다.

3회 연속, ‘이 달의 우수 매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매장의 샵마스터는 그 모든 것이 바비의 카리스마 덕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바비가 곧 다른 매장으로 떠날 것이라는 소문이 진짜가 아니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문대로 바비는 매장의 순환근무자로 발탁되었다.

회사 측은 바비의 카리스마가 전 매장으로 퍼져나가길 바랐다. 바비는 카리스마스탭으로는 최초로 샵마스터와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또한 지금껏 순환근무를 발령받은 카리스마스탭은 바비 뿐이었다. 바비는 첫 순환근무지였던 매장에서도 여러 개의 단일상품 완판의 기록을 세웠다. 자신의 매장으로 바비를 보내달라는 샵마스터들의 요청이 끊이질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즈음 나는 새로 들어온 카리스마스탭에게 거울 닦는 일을 넘겨주었다.

매장의 허드렛일에 내심 불쾌해했던 카리스마스탭 한 명이 떠난 지 이틀 만에 들어온 신참내기였다. 카리스마스탭으로 뽑힌 사람들 중 절반은 일 년을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카리스마스탭이라는 화려한 이름과 여느 판매사원보다 많은 월급에 매료되었지만 그들 모두가 꼬박 12시간을 서서 일해야 하는 고된 노동을 견뎌냈던 것은 아니었다. 거울을 닦는 힘찬 손놀림에도 불구하고 샵마스터가 신참내기를 믿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나를 부른 샵마스터가 모니터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첫 순환근무지에서 다른 매장으로 옮겨갈 바비에 대한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다. 사진의 한 귀퉁이에는 ‘카리스마 바비’라고 쓰여 있었다.

-일본에 갔을 때 이런 얼굴의 인형을 본 적이 있어. 어떤 회사에서 만든 것인데 구체관절인형 모두를 돌피라고 부르더군. 우레탄으로 만든 일 미터가량의 인형이야. 날카로우면서도 좁고 예쁜 인중이 특징이지. 그 회사에서는 절대로 이를 드러낸 채 웃는 돌피를 만들지 않는대.

사람처럼 보이는 환상이 깨진다나, 뭐라나. 잘 봐. 얘가 지금 웃는 것 같니, 우는 것 같니? 그래,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 회사에서도 딱 요만큼의 표정으로 인형의 얼굴을 빚은 거라구. 참,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야. 내가 처음 매장에 설 때만 해도 얘처럼 키가 크고 강마른 사람은 뽑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언젠가 우리 매장으로도 오게 되겠지.

일 년 후 바비는 우리 매장으로 왔다. 그 전까지 나는 매장에서 가장 유능한 카리스마스탭이었다. 나는 그날 입어야 하는 옷과 분위기를 정하는 일이 카리스마스탭에게 가장 중요한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고객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기 위해 애썼고 그들이 매장을 그냥 지나치도록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았다. 단골고객을 확보한 만큼 매출도 안정적이었다. 내가 받아야 할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바비를 쳐다보는 나의 단골고객의 첫 눈빛에서 욕망을 보았다. 그 눈빛은 바비에 대한 강한 전이와 동화였다. 바비의 옷을 사고 싶다는 생각은 그 욕망의 자연스런 결과물이라고 해야겠다. 내게는 없는, 바비만의 카리스마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샵마스터가 미영을 찾는다. 지금쯤 미영은 화장실 거울 앞에서 목과 가슴 그리고 어깨와 두 팔에 분첩을 토닥이고 있을 것이다. 미영은 우리들 중 매장경력이 가장 짧은 신참내기다. 때문에 피팅룸의 전신거울을 닦는 일은 그녀의 몫이다. 요즘 미영은 그 어느 때보다 그 일에 열심이다. 한 달 새 늘어난 3킬로그램의 몸무게 때문이다. 미영은 자신의 몸무게가 늘어난 것이 거울 때문이라고 여긴다.

누구든 그 앞에 서면 조금은 키가 커보이고 날씬해 보이도록 조작된 거울이라는 것을 미영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조금씩 몸무게가 늘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비춰주지 않은 거울에 화를 냈다. 미영이 살이 찌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미영뿐만 아니었다.

어느 날인가 미영이 입고 있는 샘플옷이 바듯하게 보였을 때 그제야 샵마스터는 미영에게 체중계를 들이밀었던 것이다. 체중계에 맨발로 올라 서 있던 미영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샵마스터는 매장에 마담사이즈는 없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리고 미영에게 5킬로그램의 체중감량을 지시했다.

-열흘은 무리가 아닐까요?

-저대로 가다간 55사이즈가 무리야. 바비는 사 년 내내 44사이즈의 옷만을 입었어. 그게 무슨 뜻인 줄 잘 알 거야. 혜주, 너도 바비와 같은 사이즈의 옷을 입는 처지라고 방심해서는 안 돼. 바비한테 밀리기 싫으면 자기관리에 철저해야 할 거야.

그러나 미영은 체중감량보다 피부화장에 전력했다. 사실 연한 카키베이지색의 피부화장은 미영을 살이 찌기 전의 모습처럼 보이는 효과를 내고 있다. 나도 가끔은 미영의 피부화장에 솔깃해진다. 바비보다 더 희고 투명한 피부색. 하지만 피부화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염색이라면 가능할까.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창백하리만치 희고 섬뜩하리만치 냉정한 쿨화이트색의 피부를 갖고 싶다.

내 옆에 서 있는 미영이 다소곳하다. 미영을 슬쩍 훔쳐본다. 제 딴에는 몰라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미영의 피부화장을 단박에 눈치 챈다. 샵마스터도 미영을 훑어보고 있다. 그러나 샵마스터는 화난 목소리로 바비를 먼저 부른다.

“오픈하기도 전에 피곤한 기색이면 어떡해? 그건 그렇다 치고, 김주연씨. 우리 매장에 온 지 육 개월이 다 돼가지, 아마?”

바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다. 연한 그린라인의 화장에도 불구하고 생기가 돌지 않는다. 커다란 초록빛 귀걸이가 바비의 얇은 귓불을 찢고 떨어져 내릴 듯 무겁게만 보인다. 샵마스터는 당일이나 월간 매출 그리고 분기 중 매출, 그 어느 것에서도 신기록을 세우지 못하는 바비를 다그친다. 바비는 아무 말이 없다. 늘 샵마스터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바비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다.

“순환근무하느라 진이 다 빠져버린 거야? 그렇다고 우리 매장에서 그러면 안 돼지. 어제 혜주가 완판기록을 세울 뻔했다는 것을 주연씨도 잘 알 거야. 변별력이 없는 카리스마라면 굳이 똑같은 조건의 스탭을 두 명씩이나 있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어떻게든 기록을 세워!”

나는 계산대 옆 옷걸이에 잠시 걸어둔 새 옷을 훔쳐본다. 새 옷은 늘 바비의 차지였지만 오늘만은 다를 것이다. 어제처럼 폐점 시간에 밀려 완판의 기록을 놓치는 일 따위는 결코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샵마스터는 바비에게 새 옷을 권한다. 바비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나간다.

샵마스터가 매섭게 나를 노려본다. 나는 다시 제자리에 서며 고개를 숙인다. 샵마스터는 어제 팔다 남은 옷을 마저 팔라고 내게 말한다. 겨우 석장이니 정오가 되기도 전에 다른 옷을 입어야 할 것이라고 위로의 말인 듯 덧붙인다.

피팅룸의 문이 벌컥 열린다.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온다.

"뭐야, 불이 안 들어오잖아."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샵마스터는 잔뜩 긴장한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는 샵마스터가 직접 관리하는 단골고객이다. 샵마스터가 재빨리 피팅룸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매장 안의 모든 시선이 피팅룸 앞을 기웃거린다. 잠시 후 샵마스터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피팅룸의 문을 두어 번 열고 닫아보지만 여전히 불은 켜지지 않는다. 자동센서가 고장을 일으킨 것 같다며 샵마스터는 여자에게 정중히 사과를 한다. 여자는 들고 있던 옷들을 계산대 앞 옷걸이 위에 아무렇게나 얹어 놓는다. 여자가 고른 세 벌의 옷은 가격대가 높은 것들이다. 샵마스터가 다른 매장의 피팅룸을 권했지만 여자는 귀찮다며 거절한다. 샵마스터는 매장을 나가는 여자에게 꼭 다시 들러달라고 부탁의 말을 건넨다.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옷을 고르던 고객들도 손을 멈추고 하나 둘 매장을 빠져나간다. 샵마스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미영이 전기실에 다녀오겠노라고 말하고는 재빨리 매장 밖으로 뛰어간다. 나는 맞은 편 매장으로 가 잠시 피팅룸을 빌려 쓸 수 있도록 부탁한 뒤 다시 매장으로 돌아온다. 샵마스터는 어딘가로 연신 전화를 한다. 얼마 후 미영이 랜턴 한 개를 들고 매장 안으로 들어온다.

"아무도 없어요. 이거라도 켜두면 그럭저럭 옷은 갈아입을 수 있지 않을까요?"

"랜턴은 무슨. 한 두 시간 정도는 앞 매장에 피팅룸 쓰면 돼요. 부탁했으니 별 말 없을 거예요."

문득 샵마스터가 옆에 서 있는 바비를 바라본다.

"주연씨. 다른 사람들은 발 벗고 나서는데 당신은 뭐 해? 어서 가서 랜턴 하나 더 가져와."

매장을 나가는 바비를 바라보던 미영이 샵마스터에게 다가간다.

"랜턴은 하나밖에 없던 걸요?"

"내 알 바 아냐."

나는 바비가 사라진 비상계단 쪽을 바라본다.

이주 전, 본사의 호출로 늦은 출근을 알리는 바비의 전화를 받고 샵마스터의 얼굴은 단박에 일그러졌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바비는 매장으로 왔다.

-본사에는 무슨 일 때문에 가신 거예요?

다 떨어진 카리스마 때문에 호출당한 것이라는 샵마스터의 비아냥거림을 훔쳐 듣고도 모른 척, 미영은 바비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계산대 위에 놓인 컴퓨터 화면에 눈길을 붙박아두고 있는 샵마스터를 바라보았다. 궁금하기는 샵마스터도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미영의 질문에 바비는 순환근무를 마치게 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우리 매장에서 쫑 친단 말예요? 다른 매장으로 안 가고 여기에 뼈를 묻는단 말이죠? 농담이에요, 웃으라고 한 농담.

미영이 저 혼자 큰 소리로 웃었다. 나처럼, 미영의 농담이 조만간 사실이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든 때문이었을까. 샵마스터의 얼굴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회사 측은 바비의 특별대우에 관한 판단과 결정을 자랑스러워했다. 때문에 순환근무를 마치더라도 바비에게 주었던 지위와 급여에 대한 특별대우까지 철회한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간의 순환근무기간으로 보자면 바비는 석 달 후라야 다른 매장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매장에 있는 동안 고정스탭으로 발령받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샵마스터가 아무 말도 없이 매장을 빠져나갔다. 바비가 매출신기록 하나 세우지 못하고 순환근무를 마치게 된다면 샵마스터는 매출부진의 이유로 본사의 호출을 피할 수 없을 거였다. 그나마 자신과 동등한 대우를 받던 바비가 여느 카리스마스탭의 신분으로 돌아간다면 조금은 느긋할 수 있으리라. 미영은 어떨까. 바비가 매장의 어떤 옷도 소화해낼 수 있는 스탭이라는 사실에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55사이즈의 샘플옷을 입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점에 은근히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바비가 고정스탭으로 남는다 해도 상관없을 미영이었다. 그러나 나는 샵마스터나 미영과는 달리 방패삼을 만한 것이 없는 처지였다. 내가 입지 못하면 바비가 입을 것이고 그런 바비가 있는 한 나는 매장의 그 어떤 옷에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었다. 되찾지 못하면 빼앗긴 것이며 그것으로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마음 한구석에 날이 섰다. 미영의 농담처럼 나는 바비의 뼈를 매장 어딘가에 깊숙이 파묻고 싶었다.

샵마스터가 나를 부른다.

"이러다간 새로 들인 옷도 재고가 될 판이야. 바비, 아니 주연씨가 입고 있는 옷, 혜주가 입어 봐. 반응이 어떤지 봐야겠어."

옷에 따라 스탭이 정해지면 대개는 이틀이나 삼일 정도 입게 마련이다. 더욱이 판매주력상품의 경우 일주일간의 판매실적에 따라 스탭을 바꾸게 되어 있다. 그런데 고작 네 시간만의 교체라니.

"주연씨는 어쩌구요?"

순간 샵마스터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잊지 마, 샵마스터는 나야."

나는 옷을 들고 피팅룸 안으로 들어간다. 랜턴을 켜자 둥근 불빛이 피팅룸 천장에 가닿는다. 머리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스레 웃옷을 벗는다. 반응이 어떤지 보겠다는 샵마스터의 말이 떠오른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바비와 마찬가지로 단 네 시간뿐일 것이다. 그 안에 어떻게든 많이 팔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폐점 시간이 되기도 전에 이 옷은 다시 바비에게 돌아갈 것이다. 피팅룸 안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옷을 입는 동안 조금씩 땀이 난다. 여느 때와는 달리 옷을 매만지는 손길이 서툴다. 벨트를 두르는 손이 떨린다. 허기 때문일까. 아침을 거른 것이 후회스럽다.

샵마스터가 피팅룸의 문을 두드린다. 밖으로 나오자 샵마스터의 시선이 재빨리 내 몸을 훑고 지나간다.

바비가 매장 안으로 들어선다. 빈손이다. 샵마스터는 바비와 눈길도 마주치지 않고 내가 벗어둔 옷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리고는 어서 갈아입으라고 말한다. 바비는 내게서 건네받은 옷을 팔에 걸친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미영이 똑같은 사이즈의 똑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나와 바비를 번갈아 바라본다. 기분이 묘하다. 바비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이다. 문득, 나는 모멸감에 휩싸인다. 저주와 욕설과 험담이 입 안 가득 고인다. 마른침을 삼킨다.

샵마스터와 미영이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서둘러 매장을 나간다. 나는 피팅룸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바비가 다가와 피팅룸의 문을 연다. 피팅룸 안의 짙은 어둠이 조금 물러선다.

문을 반쯤 열어 두고 바비는 간이수납장 위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는다. 12센티미터나 되는 통굽의 신발이 철근덩어리처럼 무거워 보인다. 바비는 들고 있던 옷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두 발목을 번갈아 가며 주무른다. 나는 바비가 걸터앉은 간이수납장을 내려다본다.

"오늘도 다이어트바 먹을 거야?"

바비가 고개를 끄덕인다. 툭, 하고 머리가 떨어져 내릴 것 같은 힘없는 고갯짓이다.

"그거 말야, 다이어트바. 선식 같은 것을 뭉쳐놓은 것 같던데 어디서 팔아?"

바비가 나를 올려다본다. 언젠가 보았던 사진 속의 그녀처럼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이다. 목덜미가 써늘하다. 다이어트바는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것이라고 바비가 내게 말한다. 집에서 손수 만든 것이어서 그렇다고 덧붙인다.

"정말? 그걸 네가 직접 만든다는 거야?"

바비는 대답 대신 특별하달 것도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무너지듯 한쪽 벽에 몸을 기댄다.

"어서 갈아입고 나와. 문을 닫아 줄 테니 랜턴을 켜."

바비가 또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문을 닫으려다가 말고 돌아선다. 바비를 내려다본다. 테두리가 희미하지만 그것은 분명 머리칼이 빠져버린 흔적이다. 바비가 며칠째 머리 윗부분을 과하다싶을 만큼 부풀린 것은 그것을 감추기 위함이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는다. 그리고 계산대로 가 아래서랍을 조심스레 연다. 바비의 핸드백 안에서 다이어트바를 꺼낸다.

나는 매장을 빠져 나와 비상계단을 내려간다. 한 층 아래 화장실을 찾는다. 화장실 출입문을 밀고 들어선다. 비어 있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앉는다. 파우치백의 지퍼를 열고 그 안에서 다이어트바를 꺼내 든다. 가볍지만 단단해 보여서 손수 만들었다기보다는 압착기 틀에서 방금 꺼낸 것 같다.

-사람이 밥을 먹어야지.

다이어트바를 먹는 바비에게 샵마스터가 말했다. 요즘에 한 끼 정도쯤은 종합영양제로 대신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미영이 거들었지만 샵마스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나는 밥을 먹으며 바비의 입안에서 자그락거리는 소리를 엿듣고 있었다. 작은 알갱이들을 시럽으로 뭉쳐놓은 크런치바가 저절로 떠올랐다. 밥을 먹고 있는데도 바삭거리는 크런치바의 단맛이 떠올라 그것을 먹지 않는 한 허기가 가시지 않을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에 젖었다.

다이어트바를 내려다본다. 단맛의 상상만으로도 내 식욕을 어지럽히던 크런치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허기진 속이라면 그것을 보는 순간 군침이 돌아야 하는데 전혀 그 반대다. 어쩌면 이것은 바비에게 한 끼, 밥이 아닌 다른 무엇인지도 모른다. 바비의 인형 같은 얼굴을 떠올리며 다이어트바의 한 귀퉁이를 깨문다. 조심스레 바조각을 씹는다. 순간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화장실을 뛰쳐나와 세면대에 반쯤 으깨진 다이어트바를 뱉어낸다. 수도꼭지를 틀고 양손에 물을 받아 입 안을 여러 번 헹궈낸다.

어쩌다 회식자리라도 생기면 바비는 영 입맛을 잃은 사람처럼 굴었다.

-혹시 배고프면 등 뒤에 건전지 끼워 넣는 것 아냐? 어서 먹으라고 한 소리야. 밥이든 건전지든 많이 먹고 힘내서 신기록 좀 터뜨려 봐. 나도 샵마스터들 모임에서 목 좀 빳빳하게 세워 보게.

술기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때 나는 옆에 앉은 바비가 인형처럼 보였다. 취기 끝의 오한처럼 자꾸만 소름이 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비가 다이어트바 말고는 무얼 맛나게 먹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다이어트바를 우물거리는 바비를 볼 때마다 크런치바의 바삭함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먹어보고 싶었다. 너도 먹어보겠니? 내가 다어어트 바를 훔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바비가 단 한 번도 내게 그렇게 물어본 적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변기 위에 앉는다. 무릎을 모으고 머리를 수그린다. 그리고 두 눈을 감는다. 바비의 정수리에 나 있던 둥근 반흔이 떠오른다. 어둑한 피팅룸을 밝히던 랜턴의 불빛처럼 바비의 정수리에서 희고 투명한 빛이 빠져나와 위로 솟구친다. 그곳에 손가락을 대보고 싶다. 내 몸이 빛으로 물든다. 나는 바비보다 더 희고 투명한 쿨화이트색의 피부색을 갖게 될 것이다. 아니 바비의 모든 것이, 그녀만의 카리스마가 내게로 옮겨올지도 모를 일이다. 두 팔로 몸을 감싼다. 눈꺼풀이 무겁다.

토막잠의 여운이 길다. 미영은 맞은 편 매장의 피팅룸 앞에서 옷을 든 채 서 있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샵마스터는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써버렸다는 경고의 표현이다. 나는 샵마스터의 눈길을 외면한 채 바비에게 다가가 그녀의 한 팔을 슬쩍 잡는다. 바비의 살갗이 차갑다. 냉동실에서 방금 꺼낸 얼음처럼 이물스럽다. 나는 얼른 손을 빼고 마른침을 삼킨다. 바비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일본에 갔을 때 이런 얼굴의 인형을 본 적이 있어. 사람이라면 한번쯤 욕망하는 그런 모습이랄까. 절대로 이를 드러낸 채 웃는 인형은 만들지 않는대. 사람처럼 보이는 환상이 깨진다나, 뭐라나.

나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선다. 바비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바비에게 말한다.

"……웃어 봐."

폐점 시간이 다가온다. 미영은 신이 나 있다. 완판의 기록을 세운 때문이다. 미영이 입고 있던 옷은 판매주력상품이 아니었다. 샵마스터조차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미영의 기분은 최고조에 달해 있다. 바비는 자신에게 할당된 당일 기본매출액도 다 채우지 못했다. 나는 간신히 평균을 넘긴 채다. 여느 때 같았으면 완판의 기록을, 생각지도 않았던 미영에게 빼앗긴 사실에 화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바비를 앞선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자위할 터였다. 하지만 나는 미영보다 뒤처진 것에 화가 나지도 않고 바비를 앞선 것 또한 기쁘지 않다. 나는 단 한 가지 생각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다이어트바를 입에 넣자마자 까칠한 감촉이 느껴졌다. 씹을수록 감촉은 날카로워 졌고 입 안 구석구석을 찔러댔다.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맛은커녕 벌레도 슬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욕지기가 올라왔다. 물로 헹궈낸 뒤에도 입 안에는 여전히 께름칙한 느낌이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어떻게 바비는 그토록 무표정한 얼굴로 다이어트바를 먹을 수 있었을까. 바비를 바라보며 그녀는 누군가에 의해 철저하게 계획되고 만들어진 정교한 캐릭터에 불과한, 어쩌면 진짜 인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또렷했다. 때문에 사람이 아닌 바비의 속에 톱밥 같은 것이 잔뜩 쌓여있는 상상이 무시로 떠올라 나는 자주 눈을 끔벅이고 비벼댔다. 그 때마다 눈 화장이 망가져 틈틈이 거울을 들여다봐야 했다. 거울을 보면 내 앞에는 바비가 서 있었다. 바비의 희고 투명한 피부는 마치 얇은 막과도 같아서 톱밥이 가득 쌓인 그녀의 속이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샵마스터가 바비를 부른다.

"주연씨, 요즘 너무 세게 빼는 거 아냐? 점심도 거르기 일쑤고 뭘 먹는 것을 못 봤어. 바람 빠진 공 같이 바디라인이 흐트러지고 있잖아. 살을 빼야할 사람은 안 빼고 주연씨가 그러면 어떡해."

미영이 단박에 얼굴표정이 굳어진다. 샵마스터는 짐짓 모른 척 한다.

샵마스터가 본사에 들어가야 한다며 핸드백을 챙긴다. 오늘은 분기 중 매출실적보고를 위한 마스터들의 정례모임의 날이다. 바비의 저조한 매출실적이 보고될 터였다. 회사측은 바비가 부하직원이라는 점을 들어 샵마스터에게 매출 부진의 책임을 추궁하려 들 것이다. 샵마스터는 두 시간여의 회의 시간 내내 바비를 다른 매장으로 보낼 방법에 대해 골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비의 카리스마가 되살아나지 않는 한 그 어떤 샵마스터도 바비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회사측은 바비가 아닌 다른 사람을 내세워야 할 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샵마스터가 매장을 나간 뒤 얼마 후 미영이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내게 말한다. 불룩한 파우치백을 들고 있다.

"피부화장 하지 말란 말을 벌써 잊었어?"

"옷에만 안 묻히면 되잖아요."

미영이 매장을 나간다. 물끄러미 미영의 뒷모습을 쫓다가 고개를 돌려 바비를 바라본다. 바비의 시선은 어느 먼 곳에 붙박여 있다.

"힘들어 보여."

멀리 부려둔 시선이 여전하다.

"힘들어 보인다고!"

그제야 바비가 나를 바라본다.

"우리 둘뿐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정말 살을 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 테지?"

바비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머물러있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내게 보여줘.'

분명 바비의 목소리였으나 그녀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는다.

"44사이즈만을 입잖아. 미영이처럼 갑자기 살이 찐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이 찔 기미도 없는데 대체 왜 그래?"

'사람들이 내게서 떠날수록 잊고 있던 허기가 돌아. 왕성한 식욕이 매일 매일 눈앞에서 꿈틀 대. 하지만 나는 내게서 떠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대로 둘 수 없었어. 옷을 팔지 못하면 카리스마스탭으로서의 내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바비는 거울 앞에 서서 부풀려진 머리칼을 매만진다.

"너무 말라도 옷 태가 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잖아. 그러다가는 매장의 모든 옷이 다 헐렁해져 버릴 거야. 결국 44사이즈도 못 입게 될 걸."

'내가 떠나면 이곳으로 누군가는 오게 될 거야. 그 누군가 떠난다 해도 역시 또 다른 누군가 그 자리를 대신하지. 우리에게 순환은 그런 거야. 늘 채워지지, 빈 틈 없이.'

바비의 부풀려진 머리칼은 매만질수록 자꾸만 갈라진다. 바비의 두 눈이 퀭하다.

"여태까지 그 어떤 카리스마스탭보다 최고의 대우를 받아왔어. 지금으로도 충분한 거 아냐?"

'신발이 너무 무거워. 통증이 발목에서부터 서서히 위를 향해 넝쿨처럼 기어올라. 하지만 얼굴을 찡그릴 수 없어. 내 얼굴에는 단 하나의 미소만 남았지. 웃는 듯 우는 듯. 하지만 견뎠어. 견딜수록 많은 옷을 팔 수 있으니까. 폐점 시간이 될 때까지 나는 옷을 파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지. 그때까지 내가 단 한 번도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면 믿을 수 있겠어?'

바비가 나를 향해 돌아선다. 두 눈에 졸음기가 가득하다.

"원형탈모증을 앓고 있다는 거 알아. 다이어트바 때문이지?"

'벌레도 슬지 않을 거야. 그것을 먹기 위해서는 바삭하고 고소한 크런치바의 단맛으로 내 안의 깊은 허기를 충동질해야 해. 무엇이든 먹기만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껏 부풀려. 그리고 다이어트바를 싼 비닐?N을 벗겨내. 머릿속에 떠올린 단맛의 기운이 사그라들기 전까지 재빨리 먹어 치워야만 해.'

바비는 거울에 등을 기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다.

"계속해서 먹었다가는 머리는 온통 반흔 천지가 되고 말 거라구. 샵마스터라면 그런 스탭에게는 어떤 옷도 권하지 않을 거야."

'카리스마스탭에게 옷을 잘 입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그것은 마네킹이나 할 짓이지. 나는 옷을 팔아야 해. 옷을 팔지 못하면 매출실적은 형편없이 바닥을 칠 걸. 신기록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우선이야. 어떻게든 남김없이 팔아치워야 해. 그럼 대체 내가 뭘 바란다고 생각했던 거야? 이런, 화장실 갈 시간을 놓쳐버렸어. 어서 내 등 뒤의 태엽을 감아 줘. 어서 감아달라니까. 인형처럼 거기 서서 뭐 해?

"혜주씨."

바비가 나를 부른다. 나는 두 눈을 끔벅인다. 그리고 바비의 입술을 유심히 바라본다.

"안되겠어. 잠깐 눈 좀 붙일게. 누가 나 찾으면 적당히 둘러대 줘."

순간, 나는 매장을 나서려던 바비의 한 팔을 붙잡는다. 피팅룸의 문을 열고 턱짓으로 그 안을 가리킨다. 바비가 머뭇거린다.

"조금 있으면 전기실 기사가 다시 올 텐데."

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젓는다. 샵마스터의 재촉에 하는 수 없이 매장을 다녀간 것뿐이라고 바비에게 말한다. 폐점 시간 전까지 피팅룸의 불은 켜지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어두운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자유롭다. 마음껏 입을 벌려 하품을 할 수도 있고 다리를 외로 꼰 채 앉아있어도 나무랄 사람이 없다.

허리를 조이는 벨트를 느슨하게 풀어도, 몸을 조이는 웃옷의 단추를 풀어헤쳐도 상관없다. 짙은 어둠이 무엇이든 감쪽같이 묻어줄 것이다. 나는 어서 피팅룸 안으로 들어가라고 바비에게 속삭인다. 살갗에 닿는 쉬폰블라우스의 감촉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에 떠밀려 바비는 피팅룸 안으로 들어간다. 간이수납장 위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는다. 바비가 랜턴을 집어 든다. 나는 바비의 손목을 잡는다. 옅은 불빛에도 잠은 쉽게 달아난다고 타이른다. 바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랜턴을 옆에 내려놓는다.

벽에 등을 기대고 두 눈을 감는다. 바비에게 깊이 잠들지 말라고 이른다. 바비의 입에서 신음소리 같은 대답이 흘러나온다. 나는 손잡이 가운데의 잠금쇠를 누르고 조용히 문을 닫는다. 그리고 계산대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고 전기실 내선번호를 누른다. 전화를 받은 기사는 내일 아침에나 들러달라는 나의 부탁을 반긴다.

피팅룸 앞에 선다. 문에 붙어 있는 전신거울은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다. 그 앞에 서서 머리칼을 돋운다. 은은한 펄감이 이제야 만족스럽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쉬폰블라우스가 매장의 불빛을 받아 반짝인다.

거울에 귀를 대뺨?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어둠은 바비의 몸에 스며들어 그녀의 희고 투명한 살갗을 물들일 것이다. 무겁고 습한 기운이 바비의 몸을 짓누르고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든다. 거울을 닦기 전 미영은 낡은 마네킹처럼 앉아 있는 바비를 보게 될 것이다.

남김없이 팔아치우는 거야, 바비. 나는 거울 속, 내게 이르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선다.

■ 소설 부문 당선 김애현씨

“젊음, 패기…, 심사 평에서 그런 단어들을 볼 때마다 불안했죠. 절망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제게 나이는 겸손해져야 될 때마다 헤아려보는 숫자예요. 오히려 위안이 돼요.”

그는 41살이고, 한 아이(초등 2)의 엄마다. 그는 그 나이를 뭔가에 새롭게 도전하기에는 부담스럽다고 보는 세상의 시선에 느긋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이 있어보였다.

소설을 써보자고 작심하고 달려든 건 결혼(92년) 뒤부터라고 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지더군요. 막연히 잘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생하셨겠다’는 말에 그는 ‘써둔 작품 수가 제 나이 만큼은 된다’며 웃었다.

당선작에서 그는 백화점 의류매장에 서서 마네킹을 대신하는 모델(카리스마 스태프)들의 애환과 사물화하는 인간성을 핍진하게 그렸고, 그 치열한 현장성이 심사 위원들의 호감을 산 바 있다. “일주일여 동안 매일 백화점 매장에 나가 온 종일 그들을 관찰하고 실제로 옷도 입어보면서 취재를 했어요. 인터넷 자료도 찾고요. 제가 선택한 브랜드의 상품 디자인이 타이트한 스타일이어서 그랬는지 손님들조차 몸매가 규격화돼있다는 느낌이었어요.”

다짐을 묻자 “뭐든 많이 써야지요”라고 했고, 잠시 뜸을 들인 뒤 “따뜻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따뜻함으로 소통하는 소설, 소통함으로써 따뜻해지는 소설이 좋다고 했다. “나의 적(適)은 나예요. 나태와 간사함, 영악함이 제게 스며들까 두려워요.”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 김애현 "나를 수긍하려고 '그저 열심히'"

소설을 쓰면서 힘들었던 것은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나를 수긍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가장 너그럽지 못한 사람이었다. 늘 다그치고 꾸짖었으며 때론 심한 모욕을 주기도 했다. 미욱한 나는 견디고 버텼다. 누군가 내게 독기를 품으라고 말해주었다.

어금니를 힘껏 물었지만 맞을 때마다 아팠다. 독기 대신 맷집이 생겼다. 맞아도 안 아프다는 얘기가 아니다. 참을 만 해졌다는 말이다. 그러고 나니 오래 걸을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몇 년을 걸었다. 나를 앞질러 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빠른 보폭을 보면서 내 더딘 걸음을 극복할 뾰족한 수가 없을까, 생각했다. 젊음과 패기 같은 단어들 때문에 지독한 몸살을 앓기도 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다. 열심히. 그 말 말고 다른 것은 없어? 누군가 내게 그렇게 물으면 나는 ‘그저 열심히’, 혹은 ‘더더욱 열심히’, 라고 말하겠다.

그런 내게 당선 소식은 그 말을 믿고 따르면 된다는 확신 같은 것이다. 또한 오래도록 걸은 나에게 그것은 잠깐의 휴식이다. 쉬면서 생각한다. 단 한 번도 쉽게 소설을 쓴 적은 없지만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래야 한다고 내게 못 박는다. 소설도 사람의 일이다. 소통이 없으면 관계도 없다. 어디든 스며들기를 마다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혼자였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 드린다. 아주 열심히 쓰겠다고 약속 드린다.

▦ 김애현(金愛鉉) 1965년 서울 출생. 세종대학교 교육학과 대학원 졸업

■ 소설 부문 심사평

컨테이너 박스에서 살아가는 가족, 병든 아내를 아내의 소원대로 살해한 남편, 천치가 되어 돌아온 남편을 아이처럼 거두는 아내. 본심 대상작 15편은 뜻밖에도 전반적으로 암울하다. 사회의 음지를 비추는 소설의 광학적 성향 때문일까, 아니면 리얼리티에 대한 낡은 관념의 속박 때문일까? 우리는 참신성을 높이 사는 한국일보 신춘문예 심사 전통에 따라 작품을 선별했다. 당선권에 근접한 작품을 고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김미영 씨의 ‘미꾸라지’는 착실하게 작법을 익힌 흔적이 있으나 어설픈 상투형을 넘어서지 못했다. 심미적이라고 여겨지는 이미지들에 무반성적으로 의존한 반면 인간관계에 대한 사실적 탐구가 부족한 결과 공소한 사랑론이 되고 말았다. 정제원 씨의 ‘웰 컴 투 마더’는 이주노동자의 특이한 세계를 다루고 있다.

디테일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어서 신뢰가 간다. 하지만 아이를 화자로 택한 것이 실수다. 이민자와 혼혈인의 삶을 박진감 있게 다룬다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보다 넓은 맥락에서 관찰하고 해부하는 성숙한 의식이 필요하다.

김애현 씨의 ‘카리스마스탭’은 작품 소재에 대한 친숙성, 날렵하게 활주하는 문장, 명확하게 부각된 스토리라인 등 여러 면에서 돋보였다. 바비라는 인물에 대한 화자의 태도가 모호하다는 점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상품화된 몸과 그 운명에 대한 보고라는 점에서 인상적인 작품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한다.

심사위원=구효서, 성석제, 황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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