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은 온 국민을 망연자실하게 만들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본인에게 있지만, 그에게 성급한 기대를 건 정부와 국민에게도 책임이 없다 하지는 못할 것이다.
외국 언론들은 한국인의 조급함을 민족성과 결부시켜 보도하고 있다. 국민 모두의 체면과 이미지가 말이 아니다. 5,000년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가 어찌 이리도 미숙한 자에게서나 볼 수 있는 조급함을 보인단 말인가? 무엇이 그리도 불안하다는 것인가?
이번 사태는 마치 마라톤 주자가 멀리 목표지점이 보인다 해서 이미 골인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또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미리 기뻐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기에 모두가 이 엄동설한에 길바닥에 나앉은 기분 아닌가?
정령 헐떡이는 가슴을 내밀어 테이프를 끊지 않은 이상, 마라톤은 끝난 것도, 기록을 세운 것도 아니며, 두 손을 높이 드는 것을 직접 확인하지 않은 이상 미리 좋아서 흥분할 일이 아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사회가 어지럽고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메시아에 대한 갈망은 당연할지 모르다. 엊그제 성탄도 바로 그건 것 아니던가? 그래서 근래 역사에 찾아보기 드문 우리의 영웅숭배가 시작되었고, 또한 온 나라의 시선과 조명을 한 몸에 모은 가운데 해발 수천 미터 구름 위를 활보하던 황룡이 하루아침에 이무기로 추락하는 해괴한 현상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본인의 문제는 그렇다 치고, 그를 성원한 우리들의 잘못은 무엇인가? 유명인사와 영웅을 착각한 것이다. 알려진 것(notoriety)과 명성(fame)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유명해서 위대한 것과 위대해서 유명한 것은 분명 차이가 있을 터인데, 우리는 이 차이를 간과한 것이다. 유명인사가 되어 진정한 명예에 이르는 길은 무명에서 유명해지는 길만큼이나 험난하다.
자신을 나타낼 줄만 알고 숨길 줄은 모르는 자는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다. 서두르기만 하고 쉴 줄을 모르는 자는 결코 월계관을 쓸 수 없다. 항상 그와 경쟁하는 시간이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의 발걸음을 배울 것인가? 먼 길로 돌아가지만 기필코 도달하는 강물의 집념과 여유를 언제나 배울 것인가?
최병현 호남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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