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일 양국 정부가 지정한 ‘한일 우정의 해’. 한일 국교 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한다는 취지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일본은 3~9월에 열린 아이치(愛知) 만국 박람회에 한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한국은 모처럼 불고 있는 한류 열풍에 힘입어 일본인 관광객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성마른 기대였을까.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 강행 등 정치적 악재가 대두된 것. 그 여파는 여행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한국관광공사가 올 한해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관광객을 4계절별로 500명씩 임의로 추출해 벌인 설문 조사 결과, 일본 방문객이 지난 해보다 5% 포인트 감소했다. 일본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는 말이 새삼 실감되는 한 해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큰 흐름으로, 한국과 일본의 문화는 끊임 없이 융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일본 도호쿠(東北) 지역 중심부 이와테(岩手)현의 모리오카(盛岡)이다. 모리오카는 이와테현의 현청이 있는 인구 30만명 가량의 소도시이다. 이렇다 할 볼거리가 없어, 관광지로서의 매력은 거의 없는 곳이다.
한국의 문화를 일본에 파급하는 진원지가 바로 이 곳이다. 그 중심에 옻칠장인 전용복(53)씨와 모리오카 냉면의 대가 변용웅(57)씨가 있다. 배용준이나 장동건 전에도 한류는 있었다. 그 소리 없는 열풍을 이끌어 온 한류의 원조들을 만났다.
전용복씨는 지난 해 5월 문을 연 일본 최대의 옻칠 박물관인 이와야마(岩山) 칠예미술관의 관장이다. 그는 1988년 일본 도쿄 한 복판에 위치한 일본 최대의 연회장 메구로메조엔(目黑雅敍園)을 개보수할 당시 수십년 묵은 옻칠 작품을 5년에 걸쳐 완벽하게 복원, 일본 열도를 놀라게 했던 주인공이다. 연회장에 옻칠을 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는 문화적 의미가 상상밖으로 크다.
우선 일본을 뜻하는 영어 단어 Japan을 보자. 이 단어가 소문자로 쓰이면 옻칠이라는 의미가 된다. 도자기를 뜻하는 china가 나아가 중국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일본인에게 옻칠은 그들 문화의 자부심인 셈이다. 메구로메조엔이라는 곳은 또 어떤가.
1931년 건립 당시 일본 최대의 옻칠 장인들이 대거 동원, 벽면을 도배하다시피 한 대중 연회장이다.
이 곳은 지금도 일본인이 가장 선호하는 예식장이자 피로연장이다. 온갖 상징성이 똘똘 뭉친 그 곳의 복원작업을 부산의 무명옻칠작가가 일궈냈으니 그들의 자존심이 상당히 구겨졌을 만 하다. 모리오카는 그가 옻칠 작업을 위해 정착한 곳으로 지금까지 17년째 거주하고 있다. 이와야마도 이와테의 이와(岩)와 고향 부산의 야마(山)에서 한 자씩 따 지은 이름이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만 가지 생명들의 합창’이라는 옻칠 작품이 손님을 맞는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옻칠을 한 접시를 다닥다닥 붙인 가로 7.65m, 세로 1.25m의 작품이다. 옻 도료가 이렇게 다양한 색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하지만 정작 놀란 것은 접시의 모양의 우리의 제기(祭器)와 너무도 닮았다는 사실이다. “옻칠은 원래 우리의 것이었으나, 백제 시대 그 기법이 일본으로 전해진 뒤 우리의 칠 예술은 쇠퇴하고 일본은 번성했다. 하지만 옻칠의 기저에는 한국의 혼이 흐르고 있다.” 전씨의 지론.
실제로 그가 만들어 낸 모든 옻칠 작품에 한국의 미가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이와테의 혼’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옻칠로 제작된 세계 최대 규모의 작품. 가로 18m, 세로 2.4m로의 공간에 이와테지역의 산, 태양, 호수를 담고 있지만, 일본화에서는 보지 못 하던 형상들이다. 그 유려한 곡선미, 영락없는 한국의 것이다.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옻칠 기법을 가진 일본에서 인정 받으려면 옻칠의 원조인 한국의 정서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작품 철학이다. 일본 최대의 미술관을 운영할 수 있는 것도 일본인에게는 없는, 옻칠 문화에 대한 이해가 받쳐져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한다.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일본인 제자가 줄을 섰고, 그 문하생이 800여명에 달한다.
그의 이름이 이 곳에 널리 알려진 것은 지난 달 부산에서 열린 APEC 정상 회담을 통해서였다. 그가 작업한 100여점의 옻칠 작품이 회담장인 벡스코(BEXCO), 누리마루 APEC 하우스, 롯데호텔 CEO 포럼장, 부산시청 등을 도배하다시피 했던 일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그의 작품에 감탄했던 것은 당시 모여있던 세계의 정상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쉽게도 내년 초부터 3월까지, 그는 또 다른 작업을 위해 미술관을 닫는다고 한다. 대신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한국에서 마련된다. 1월 4일부터 10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는 전씨가 APEC 당시 선보였던 작품들을 전시, 아쉬움을 달래준다. (02)730-5454
모리오카, 하면 일본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모리오카 냉면’?얼른 떠올린다. 일본인이 한국식 불고기와 비슷한 야키니쿠를 먹고 난 뒤 즐겨 찾는 음식이다. 메밀과 전분을 섞어 흡사 쫄면같은 면발에 소뼈로 우려낸 국물, 배, 계란, 오이 등을 넣어, 외양은 물냉면과 흡사하다. 여기에 매운 무김치로 간을 조절한다. 매운 물냉면이라 해야 할까, 한국의 냉면과는 분명 다르지만 한국인의 입맛에 딱 맞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알고 보니 이유가 있다. 이 냉면을 개발한 주인공은 함흥 출신의 교포 양용철씨이다. 1954년 일본으로 건너간 양씨는 함흥 냉면과 평양 냉면을 접목, 특유의 모리오카 냉면을 만들었다. 나아가 그는 모리오카 시내의 야키니쿠 식당 쇼쿠도엔(食道園)을 차려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의 반열에 올렸다. 지금은 그의 아들 아오키 마사히토(45)씨가 가업을 이어 받고 있다.
이 같은 대중적 성공의 디딤대가 된 곳이 모리오카 냉면의 원조집 편편샤(邊邊會)이다. 이 식당은 재일교포 2세인 변용웅씨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18년째 영업중이다. 그의 아버지는 양용철씨의 친구로 냉면 제조의 비법을 전수 받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변씨는 면발처럼 질긴 내력이 담긴 모리오카 냉면의 업그레이드에 도전했다. 일본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맛볼 수 있도록 모리오카 냉면의 포장 판매에 주력하고 있다. 올 한해만 150만개를 팔아 치운 것은 물론, 이와테 지역에 분점도 6개를 차렸을 정도다. 현재는 그 기세로 한국 시장 진출까지 조심스럽게 고려중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변신에 성공한 우리 냉면이 역수입이라는 경로를 통해 금의환향을 꿈꾸고 있는 셈이다.
이와테(일본)=글·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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