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씨 논문조작 사건을 보면서 놀라는 것은 우선 거짓에 대한 우리 사회의 둔감함이지만 두번째로 놀라운 것은 연구실이 마치 공장처럼 운영된다는 데 있다. 논문의 공동저자들 대부분 조작 사건의 진상을 몰랐는데 그 첫번째 이유는 자기가 일을 하지도 않고 이름을 빌려준 탓에 생긴 일이지만 두번째는 자기 일만 하고는 남의 일은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지위는 대학원을 졸업한 연구원들인데, 이들이 자기 일만 해서 남의 일을 몰랐다는 말은 결국 자기 일이 전체 맥락 속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모르고서 시키는 일만 했다는 말이 된다. 이게 공장인가, 연구실인가.
●월화수목금금금 연구 풍토
공장은 시키는 일만 한다. 끼우라는 부속만 끼우고 올리고 내리라는 스위치만 올리고 내리면 된다. 그래야 똑같은 제품을 만드는 공정이 착오 없이 빠르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실은 다르다. 공장은 빠른 시간에 단일한 물건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이지만 연구실은 ‘빨리’ 만드는 게 아니라 ‘뛰어난’ 물건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연구원들의 두뇌를 모두 짜내서 부족한 점은 없는지 살피고 토론하고 다시 작업에 들어가야 수준 높은 결과가 나온다.
그런데 일하는 과정이 공장하고 다를 바 없다니, 두뇌를 써야 할 사람들을 수족만 썼다는 말이 되는데 그러고도 수준 높은 연구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놀랍다.
일하는 시간도 그렇다. 황우석씨가 구사한 현란한 어휘 가운데는 ‘우리는 월화수목금금금 일한다’는 표현이 있다. 쉬는 날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보다 어리석은 연구자세는 없다고 한다.
사실 고도의 연구에 들어서면 상상력이 발휘하는 힘이 점점 커진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새로운 방식이나 내용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데, 그런 창의력을 발휘하려면 적당한 게으름이 있어야 한다.
이제는 인용하기가 진부할만큼 유명해진 이야기이지만 벤젠의 고리를 알아낸 프리드리히 케쿨레는 꿈속에서 힌트를 얻었다고도 하지 않는가.
골똘히 그 문제를 생각하되 몸을 혹사하지는 않는 게으름, 다른 분야를 연마하면서 생각의 차원을 달리하는 순간이 연구자에게는 필요하다. 그래서 노벨상을 수상한 로버트 러플린 카이스트 총장 같은 이는 피아노를 즐기고, 신희섭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신경과학센터장은 요가를 즐긴다. 그런데 월화수목금금금이라면 도대체 언제 창의적인 사고를 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새벽 6시면 회의 소집이라니, “건설회사에나 해당되는 이야기를 과학자가 해서 놀라웠다”는 다른 과학자의 말이 딱 맞는 표현이다. 연구는 노동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의 질이 문제인 공간인데, 그걸 모르는 게 자랑이었다.
연구원들끼리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는 것은 그들끼리 토론할 시간도 없었다는 말이다. 사실 요즘 과학계의 연구는 한 분야만 잘 알아서는 안 된다. 분자생물학과 화학과 전기공학과 철학까지도 가세해야 인공지능을 연구할 수 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연구실마다 다양한 전공자들을 붙여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공장시대의 마인드 졸업해야
미국의 벨연구소가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힘도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최고 연구원들을 한 곳에 모아 놓으니 이들이 밥먹으면서 놀면서 지나가면서 툭툭 던지는 말에서 서로의 상상력이 자극을 받고 배우고 해서라고 임지순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는 진단하기도 했다. 그의 나노튜브 연구도 화학 생물학 연구자들과 끊임없이 토론하며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학제간 연구가 중요한 과학계에서 각 분야 연구자들을 데려다 놓고서는 각기 다른 그들의 시각을 맘껏 풀어놓을 기회를 주지 않고 시키는 일만 하도록 한 데서도 황우석씨가 추구한 것은 연구가 아니라 다른 것이 아니었지 않나 싶다.
이번 일을 계기로 공장 시대의 철학으로 과학을 움직이는 시대도 끝났으면 좋겠다.
서화숙 대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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