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9세인 K는 자타가 공인하는 TV홀릭이다. 일찌감치 ‘고용살이’에 대한 희망을 접은 K는 마지못해 대학원에 적은 두었지만, 학업에도 뜻이 없으니 백수에 가깝다. 시간이 화수분처럼 넘쳐 나는 덕분에 세끼 밥 먹는 시간을 포함해 하루 20시간 이상을 TV삼매경에 빠질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그에게 TV는 공짜거나, 아주 싼 값에 살 수 있는 달콤한 케이크 조각이다. 거기엔 TV에는 꿋꿋한 금순이가 있었고,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설정답지 않게 꽤 잘난 삼순이가 있었으며, ‘불륜은 죄악’이라는 가르침을 주는 맹순이(장밋빛 인생)도 있었다. 그뿐이랴. 형사와 사랑에 빠진 대통령 딸 재희(프라하의 연인)와 이혼 직전까지 간 딸과 백수 자식도 군말 없이 감싸 안아주는 안 교감(부모님전상서)도 있지 않았던가.
TV는 또 미처 다 완성되지 않은 불멸의 판타지이며 다시 시작할 수 없는 롤 플레잉 게임이다. 죽음의 순간, 신을 닮아버린 이순신(불멸의 이순신)을 만났고, 노예에서 바다의 왕자로 스스로 해방된 장보고(해신)와 조우했다. 세상을 뒤엎고 싶었던 사내 신돈과는 지금도 매주 만나고 있다.
TV는 게다가 슬픔과 고통 사이에서 홀연히 피는 우담바라를 보여주는 확대경이며 지옥도에 들이댄 만화경이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담은 ‘인간극장’서부터, 가족 안에 숨은 폭력을 고발하고 있는 ‘긴급출동 SOS24’과 은둔형 외톨이의 실상을 밝힌 ‘추적60분’까지.
여기까지는 사실 다른 해보다 크게 특별하달 수 없는 넋두리지만, 시청환경 만큼은 올해 유난히 잔혹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어머니와 저녁을 먹다가 보던 ‘올드미스 다이어리’(KBS 2)에서 ‘싸가지 없는’ 며느리가 느닷없이 시어머니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나오는 바람에 잔뜩 화가 난 어머니로부터 모진 화풀이를 당했다. “이 따위 ‘싸가지 없는’ TV는 보지말고 취업 좀 하라”는.
갓 사춘기를 맞은 여중생 조카와 모처럼 함께 ‘음악캠프’(MBC)를 볼 때의 황당함은 또 어땠는지. 멀쩡한 출연자가 훌렁 바지를 내리는 순간 조카의 비명에 놀라 부엌에서 뛰쳐나온 형수의 뭉크 그림 ‘절규’ 속 인물 같았던 표정이란. 퇴근 뒤 얘기를 듣고 분개한 형의 ‘TV 안 보기 운동’ 특강이 밤 늦도록 지겹게 이어졌다. 물론 K는 굴복하지 않았다. 아니, 딱이 돈 안 들이고 할 일이라곤 없었던 터라 굴복할래야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만.
TV를 끌어안고 사는 그에 대한 식구들의 탄압이 극에 달한 건 ‘PD수첩’(MBC)이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석연치 않다며 물고 늘어졌을 때부터였다. 3년 전 공직에서 퇴직한 깐깐한 아버지는 펄펄 뛰면서 저 불온하기 이를 데 없는 방송에 대해 ‘시청 불가령’을 내렸다.
TV에 빠져 사는 이들이 그렇듯 잔 머리가 빤한 K로서도 도무지 사태를 가늠키 어려웠다. 도대체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누가 실체고 누가 허깨비인가? TV가 현실을 모사하는 것인가 아니면 현실이 TV와 닮아가는 것인가? 엉성한 리얼리티쇼 보다도 재미고, 사실성도 덜한 이 헷갈리는 현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올해 들어 여러 차례 상처입고 지친 그는 앞으로는 애써 판단하려 들지 않고 그저 손 끝에 리모컨 버튼이 닿는 대로 TV 속 공간을 생각 없이 돌아다니기로 결심한다. (사실 이제까지 시청태도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TV가 현실의 반영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진짜’ 현실은 TV를 끈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우면 백수로서의 현실과 꽉 막힌 미래가 주는 공포에 자주 식은 땀이 흐른다. 어쩌면 TV에 그토록 매달리는 이유도 그런 무시무시한 현실감에서 도망가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가 언젠가 현실과 마주할 용기를 회복한다면 더 이상 TV홀릭이란 소리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퇴근길의 어느 포장마차나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와 마주치게 될 지도 모른다. “TV가 점점 낮고 가난한 자들의 미디어가 돼가고 있는 데도, 정작 프로그램 내용이나 제작태도는 다들 왜 그토록 오만하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가”라며 ‘제대로’ 분개하는 그를.
김대성기자 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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