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문다. 여느 해처럼 올해도 다사다난했다. 사실 다사다난하지 않은 해가 어디 있으랴. 언론들은 한 해의 수많은 사건들을 정리하는 방편으로 10대 뉴스를 선정하곤 한다. 하지만 정리하기로 치면 뉴스는 두 가지 종류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
아주 간단하게 좋은 뉴스가 많았던 해는 우리가 행복했던 해이고, 나쁜 뉴스가 많았던 해는 다소 불행했던 해로 정리해 버리자. 세상이 이처럼 간단명료하면 얼마나 상쾌할까. 좋은 뉴스는 좋은 뉴스이고 나쁜 뉴스는 나쁜 뉴스인, 그런 순수하고 정직한 세상은 불행하게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하더라도 부분적으로만 존재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좋은 뉴스가 나쁜 뉴스가 되고, 나쁜 뉴스가 좋은 뉴스가 되기 일쑤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나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오히려 좋은 뉴스에서 나쁜 뉴스의 징조를 내다볼 수 있고, 나쁜 뉴스에서 좋은 뉴스의 희망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삶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를 넘나드는 변증법적 사고는 뉴스를 다루는 언론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지혜이다. 언론은 좋은 뉴스를 좋은 뉴스 또는 나쁜 뉴스로 만들 수 있고, 또한 나쁜 뉴스를 좋은 뉴스 또는 나쁜 뉴스로 만들 수 있다.
훈훈한 정이 묻어나는 미담 기사는 언론이 보도한 좋은 뉴스가 그대로 좋은 뉴스가 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좋은 뉴스는 방심하는 사이 나쁜 뉴스로 변한다.
기자가 사실을 왜곡하고 포장하고 미화해서 만든 미담기사, 취재원의 PR에 춤추다 사실 관계를 놓친 황우석 영웅 만들기 기사들은 한때 좋은 뉴스였다가 치명적으로 나쁜 뉴스가 됐다. 지금 우리는 좋은 뉴스가 조작됐다는 나쁜 뉴스를 접하고 있다.
언론의 격언 중에는 ‘나쁜 뉴스가 좋은 뉴스 (Bad news is good news)’라는 말이 있다. 최근의 황우석 파동은 비판의식 없는 좋은 뉴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당시에는 위험스러워 보이는 나쁜 뉴스가 어떻게 사실을 바로잡는 좋은 뉴스가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11월 들어 윤리문제와 논문 진위 논란에 관한 나쁜 소식이 들려오기까지 황 교수와 관련한 많은 좋은 뉴스들은 결과적으로 오보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한때 좋은 뉴스는 결국 나쁜 뉴스였던 것이다.
PD수첩의 나쁜 뉴스는 결과적으로 좋은 뉴스가 됐다. 민주사회에서 언론의 정도는 역시 오만한 권력을 감시하고 비리와 부조리를 고발하는, 나쁜 뉴스를 생산하는 악역을 자임하는데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언론이 나쁜 뉴스를 생산해야 하는 이유는 민주주의는 언제나 인간과 사회의 오류 가능성을 전제하고 오류를 시정해 나가는 사명을 일정부분 언론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쁜 뉴스가 그대로 나쁜 뉴스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한국 언론에서 자주 목격되는 공격 저널리즘 성격을 띤 기사들은 구제될 수 없는 나쁜 뉴스에 해당한다.
언론들이 정치권력에 대해, 또는 다른 언론에 대해 정파나 이념적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방과 공격, 선전을 일삼는 것은 언론의 비판과 감시영역을 명백히 벗어난 행위이기 때문이다. 황우석 파문에서도 일부 언론은 나쁜 마음으로 나쁜 뉴스를 만들어내 스스로 나쁜 언론이 됐다.
언론은 사회의 건강을 진단하는 의사와 같다. 의사가 환자의 건강을 좋다고 얘기하는 것은 기쁜 뉴스가 된다. 그러나 병을 오진하여 질병이 있는 환자에게 건강하다고 좋은 뉴스를 말하게 되면 그것은 나쁜 뉴스가 된다.
의사의 가장 큰 역할은 역시 환자의 병을 찾아내서 제대로 알려주는 나쁜 뉴스를 전달해 주는 것이다. 그래야 환자는 치료를 해서 고칠 수 있다. 반면에 있지도 않거나 아주 작은 병을 떠벌려서 과잉의료 행위를 하는 의사는 말할 것도 없이 나쁜 의사이다.
새해에는 우리 사회가 나쁜 병을 제대로 진단하는 좋은 의사를, 그리고 나쁜 뉴스를 제대로 보도하는 좋은 기자를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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