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중간선거를 통해 미국 상ㆍ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클린턴 행정부의 손을 묶어놓을 심산으로 균형예산을 들고 나왔다.
깃발은 극우 보수주의자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이 잡았다. 하지만 복지 강화 등의 명분에서 앞선 클린턴 대통령은 기세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그 결과 새 회계연도가 시작되는 10월1일까지도 예산안이 확정되지 않아 미국 역사상 초유의 연방정부 폐쇄 사태가 벌어졌다.
백만명이 넘는 연방공무원들을 사실상 실직자로 내몬 이 싸움은 7개월 동안이나 계속됐고 승패와 관계없이 여야 모두 큰 상처를 입었다.
▦사학법 개정안의 날치기 처리에 대한 한나라당의 분기(憤氣)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아 새해 예산안이 실종될 위기에 처했다.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인 매년 12월2일까지 국회가 예산을 확정토록한 헌법 54조 규정을 어겨 위헌적 상황에 놓인 것에서 더 나아가 ‘한국판 정부 폐쇄’상황이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우리의 예산제도와 정부운영 방식은 미국과 다르다. 또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이 계속 장외에서 맴돈다면 연내에 예산안 단독 처리를 강행할 태세다. 섣불리 국정마비 시나리오를 말할 계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이 예산을 다루고 보는 시각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예산은 한해 국민경제 또는 국가운영의 내용과 목표를 계량적으로 표시한 것으로서, 국민의 삶을 규정하는 국정의 전모가 투영된 거울이다. 그래서 이를 충실하게 심의ㆍ의결하는 것은 국회의 가장 중요한 권한이자 의무다.
아이러니한 것은 군사독재정부 시절에는 날치기를 일삼으며 헌법시한에 집착한 반면, 문민정부 국민정부 참여정부에서는 이 시한이 대부분 무시됐다는 점이다. 특히 지난해엔 새해를 10여분 남기고 예산안이 통과되는 진기록까지 세웠다.
▦이러다 보니 예산안에 관한 한 위헌ㆍ위법적 상태가 자연스런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거 날치기에 대한 거부감이 만든 잘못된 학습의 결과다. 불과 수십시간 지나면 해가 바뀌지만 이번에도 국가 정체성 투쟁에 나선 야당이나 단독처리 으름장을 놓는 여당은 태평스럽다.
“매년 그래왔는데, 예산, 그 까이꺼 뭐, 대충 대충…”식이다. 예산안의 낭비적 요인이나 처리 지연으로 초래되는 국가적 비용에는 관심이 없다. 적당히 지역사업이나 끼워넣으면 된다는 태도다. 이런 국회를 업고 살아야하는 국민들이 딱하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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