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고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 통하는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게이오(慶應)대 법학부 학장이 서울을 찾았다. 연말의 연례행사로 굳어진 한국 방문이지만 올해는 한국 제자와 후학들이 만든 회갑기념 논문집‘신 한일관계론’ 헌정식 참석도 겸했다. 모처럼의 기회에 한일 관계를 비롯한 한반도 주변 정세에 대한 그의 평가와 전망을 들어 보았다. [편집자주]
_올해는 한일 양국의 갈등이 두드러졌는데 소감은.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인 ‘우정의 해’가 안타깝게도 독도ㆍ야스쿠니(靖國) 신사 문제로 얼룩지고, 양국 지도자끼리의 신뢰가 붕괴한 상태다. 양 국민의 교류가 그런 정치적 마찰을 덮을 정도로 풍성해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_정치적 마찰의 직접적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지나치게 미국 편향적이고, 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미국과 잘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착각하고 있다. 자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과거에 대한 정당화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데 대한 감각이 없다. 물론 그가 과거를 정당화하려는 생각은 아니라고 보지만 그런 오해를 사고 있는 것이 현실이자 불행이다.”
_그런 ‘오해’의 배경은 무엇인가.
_“크게 보아 동아시아는 냉전 이후의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 냉전 시대에 한일 양국은 공동의 적이 있어서 각각의 정체성 인식도 그런 구조에 함몰돼 있었다. 냉전 이후 지정학적ㆍ역사적 측면에서 정체성 인식의 차이가 뚜렷해지고 있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을 숙명으로 여기지만 한국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고려를 해야 한다. 지정학적 시각의 차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양국 공통의 가치관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 역사적 시각 차이는 쉽사리 해소하기 어렵다.”
_역사 인식의 차이는 불가피하다는 얘긴가.
“역사적 시각 차는 결국 과거사에 대한 화해가 얼마나 이뤄졌느냐의 문제다. 과거 전쟁이나 침략을 둘러싼 화해는 주로 망각에 의존했다. 그러나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전쟁의 참화가 국민 전체에 미치면서 망각을 통한 화해는 불가능해졌다. 대신 등장한 것이 국제재판을 통한 화해다. 독일은 뉘른베르트 전범재판을 통해 가해 책임을 나치에 돌림으로써 교묘하게 주변국과 화해를 연출했다. 그러나 도쿄(東京) 전범재판을 통해 일본이 한국과 화해에 이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_어떤 한계인가.
“일본의 가해 상황이 독일과는 달랐는데도 도쿄재판은 뉘른베르크 재판처럼 2차 대전에 대한 책임을 물었을 뿐 식민지 지배의 책임은 묻지 않았다. 재판을 주도한 승전국이 모두 식민지 종주국이었다. 그것이 역사적 화해의 출발점이어야 할 ‘법적 화해’를 막았다. 히로시마(廣島)ㆍ나가사키(長崎)이 피폭이나 도쿄 대공습에 따른 민간인 피해가 커서 일본 국민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의식을 갖게 된 것도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가로막았다.”
_그 뒤로도 많은 기회가 있지 않았나.
“식민지 지배 역사의 청산은 결국 한일 간 교섭에 의할 수밖에 없었는데 기본조약에 사죄ㆍ반성이 언급돼 있지 않듯 법적 청산 없이 일종의 사적 화해로 끝났다. 도쿄 재판에서 식민주의를 단죄했으면 불가능한 결과였다. 30년 후인 95년의 무라야마(村山) 담화나 98년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서 일본의 사죄ㆍ반성이 있었으나 이미 역사 교과서 파동을 거치며 양국이 민족주의적 시각의 역사논쟁에 들어간 후였다. 너무 늦었다.
물론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주도한 공동선언은 훌륭했다. 한국은 전후 일본의 평화 노력과 민주주의 발전을 칭찬하고, 일본은 외교문서로 분명하게 사죄ㆍ반성을 표명했다. 하나의 전범이고, 그래서 대중문화 교류의 길을 열어 한류붐을 이끌어 냈다. 대중문화 교류는 일종의 화해 기능을 한다.”
_일본에서 왜 지금 민족주의 흐름이 나타나나.
“냉전 종식은 공교롭게도 시기적으로 일본의 거품경제 붕괴와 겹쳤다. 10여년의 침체기를 겪으며 자신감을 상실했다. 따라서 일본의 정체성 회복은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자는 노력이다. 일부에서 엉뚱한 흐름, 과거지향적 의식이 나타나고 있지만 기본방향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 등 보편적 가치관에 근거해 있다. 이런 가치를 기반으로 동아시아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것인데, 그렇게 형성되는 동아시아 공동체에서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를 두고 일본은 중국이 아닌 자신이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_결국 과거 대동아 공영권 구상과 비슷하지 않나.
“전혀 다르다.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3점 세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런 가치관이라면 새로운 동아시아 공동체는 밖으로 열린 것이 된다. 다만 낡은 가치관을 가진 극히 일부 인사가 있고, 그것이 전후 화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잠재한 역사 인식을 풩藥?과거 회귀적 움직임을 연상시키고 있을 뿐이다.”
_한국과 중국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한국과 중국은 다르다. 한일 양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어떤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인가도 별 차이가 없다. 인권과 인도주의가 존중되는 나라를 만들고 싶어 하고, 그것을 아시아 공동체의 바탕으로 삼고 싶어 한다. 중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측면에서 여전히 한계가 있다. 그런 중국을 포함한 공동체는 과거 그랬듯 중국중심의 닫힌 세계가 되고 만다.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집어넣는 것이 한일 공통의 과제다.”
_한국 정부는 오히려 중일 사이의 균형자 역할에 관심이 많다.
“균형자론은 장차 한국이 어디로 갈 것이냐는 관점이라면 훌륭한 구상이다. 그러나 지금 바로 그런 위치에 서겠다는 건 무리다. 통일 이후, 한국이 더욱 발전한 후라면 좋았을 것이다. 또 그런 역할을 하려면 한국이 더욱 성숙해야 한다.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참된 균형자가 될 수는 없다.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도 그렇지만 중일 사이의 균형자 역할도 간단하지 않다. 역량을 갖추어야 하고, 무엇보다 냉정한 판단과 성숙한 외교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국 어느 쪽으로 기울어 버린다.”
_현재 한국이 중국으로 기울고 있다는 얘긴가.
“냉전이 끝났으니 어느 정도의 전략 수정은 당연하다. 다만 균형자가 되려면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아주 신중히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한국이 진정한 균형자가 되려면.
“한일 양국이 공동허브를 만들어, 즉 양국의 힘을 합쳐서 장기적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의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ㆍ시장경제 허브를 만들어 교량 역할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_그런 협력은 결국 진정한 화해 위에 성립하는 것 아닌가.
“고이즈미 총리의 자신감 과잉으로 보아 그의 재임기간 중 한일 정상회담 은 어렵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아시아 경시 외교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어 포스트 고이즈미 체제가 현재의 노선을 유지하긴 어렵다. 현재 후계자로 거론되는 사람들의 시각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들은 아직 성장 도상의 정치인이므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다.”
_화해의 걸림돌은 한국측에도 있는 것인가.
“화해는 늘 쌍방의 문제다. 비유하자면 우선 가해자가 신사여야 하지만 피해자도 관용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양국의 화해는 민주주의ㆍ시장경제를 공유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미래를 보는 데서 시작된다. 역사를 돌아보는 일도 과거의 문제를 샅샅이 훑어서 흠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어디로 갈까를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보는 것이어야 한다. ”
-한국의 사죄ㆍ반성 요구가 일방적이란 얘긴가.
“가해자라고 일상적으로 가해 사실을 의식하며 사는 게 아니다. 손자 대까지 사죄와 반성을 거듭하라는 것은 무리다.”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이 내년에 재개된다는데 전망은.
“대북 교섭은 고이즈미 외교의 유일한 만회책이다. 북한이 응한 것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교섭이 대미 관계 개선의 교량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핵 문제나 국교정상화 교섭 모두 시한이 있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임기는 9월까지고, 미국은 11월에 중간 선거가 있다. 그 이전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상황은 어려워진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유연한 자세를 보이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전략적 판단을 할 수 있다면 고이즈미 총리가 다시 평양에 갈 수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그걸 바라겠지만 조건이 정돈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중일 관계 회복 전망은.
“중일 관계는 장쩌민(江澤民) 이래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기본적으로 그것이 한국과는 다르다. 한일 양국도 한국을 군사정권이 지배한 80년대까지는 ‘체제 마찰’이 있었다. 냉전 이후 상황은 일변했고 지금은 체제마찰이 없지만 중일 간에는 여전히 체제마찰이 있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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