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법원의 재심(再審) 개시 결정은 이용훈 대법원장이 추진하고 있는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법원은 이번 재심 개시 결정에서 그 동안 엄격하게 적용해 왔던 재심 개시 사유를 폭 넓게 해석함으로써 재심을 통한 과거사 정리의 준거를 제시한 셈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사법부로선 가장 괴로운 과거이다. 대법원이 관련자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지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돼 ‘사법 살인’으로 불려졌다. 국제법학자협회는 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인혁당 재건위는 이 대법원장 취임 후 법원이 내린 첫 재심 개시 결정이다. 이 대법원장이 취임 직후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내지 못하고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며 사법부 과거사 정리 의지를 천명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재심 결정은 대법원장의 뜻이 일정 부분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법원은 그 동안 재심을 통한 과거사 정리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특별법 제정 등 강제적인 계기가 마련되거나 원심 판결이 잘못됐다는 증거가 판결로 확정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재심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번 재심 개시도 2002년 12월 재심이 청구된 이후 3년 만에 내려진 결정이다.
이 대법원장은 사법부 과거사 정리에 대해 “재심을 통한 방법이 바람직하나, 재심 사유가 법으로 정해져 있어 뭐라고 말하기 힘들다”고 밝힌 바 있다. 형사소송법 420조는 재심 사유를 원판결의 증거가 확정판결에 의해 위조ㆍ변조되었거나 허위인 사실이 증명된 때, 또는 명백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된 때 등으로 제한하고 있다.
시민단체나 재심 청구자들은 법원이 재심의 사유를 너무 엄격하게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다른 한편에선 재심을 남발하면 적법 절차에 따라 확립된 판결을 부정해 법적 안정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우려해왔다.
이런 맥락에 비추어 볼 때 법원의 이번 결정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확정판결에 버금가는 결정으로 받아들여 재심 사유를 폭 넓게 해석한 것으로 평가된다. 형소법은 재심 사유로 확정판결을 전제하고,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는 경우에는 사실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의문사위 조사 결과에는 당시 직접 당사자인 수사관이나 경찰관의 자백이 없다. 대신에 피고인들이 수감됐던 구치소 교도관, 같은 혐의로 조사받던 피의자들, 피고인들의 가족이나 변호인들의 진술에 의존해 형소법이 규정한 ‘명백한 증거’에 해당되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 개시 결정은 다른 사건에도 영향을 미칠 것을 보인다. 진보당 조봉암 위원장 사형 선고,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에 대한 내란목적 살인죄 적용, 하급심의 재심 결정을 대법원이 번번이 기각해온 신귀영 간첩 사건 등이 기다리고 있다.
최영윤 기자 daln6p@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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