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하늘이 밝은 햇살 아래 우리는 함께 가요 서로 손 잡고”(‘보리울의 여름’ 중에서).
분홍 정장과 포도주 색 티셔츠를 번갈아 입어 가며 제법 공연단원 티를 내고 있는 22명의 지체장애아들. 크리스마스를 이틀 남겨 놓은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 어린이병원 2층 로비엔 ‘에반젤리’(좋은 소식ㆍ福音이라는 뜻) 합창단 단원들의 맑은 노래 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링거를 꽂은 채 휠체어를 타고 나온 어린이와 엄마 품에 안겨 힘겹게 눈을 뜨고 있는 아기들로 100여 좌석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처음 합창단 결성을 제의한 사람은 가톨릭 어린이 합창단 ‘마니피캇(라틴어로 ‘찬미하다’라는 뜻)’의 지휘자 김은나(28ㆍ여)씨였다. 지난해 여름 김씨가 함께 저녁을 먹던 홍창진(46) 신부, 탤런트 손현주(41)씨 등에게 ‘우리도 장애아 합창단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고 다들 흔쾌히 동의했다. 올해 1월 드디어 장애가 둘 이상인 중증장애아, 지체장애 3급보다 더 불편한 몸을 지닌 어린이를 대상으로 공개 오디션을 열어 단원 19명을 뽑았다.
합창단은 지금까지 희귀병 어린이를 비롯해 소외된 이웃을 위해 노래를 불러 왔다. 지금도 28명의 단원이 김씨의 지도 아래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경기 과천시민회관에 모여 연습을 한다.
지체장애 3급인 강석우(14)군의 어머니 이애경(46)씨는 처음엔 ‘우리 애가 잘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런데 음악이 사람 마음을 열게 하나 봅니다. 이젠 우리 아들에게 ‘나도 남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은 것 같아 참 기분이 좋습니다.”
이날 합창단 막내 민지(초등학교 1학년)에서 큰언니 격인 홍미연(16)양까지 ‘보리울의 여름’을 시작으로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등을 연이어 부르자 앞 좌석을 메운 30여 소아 환자들도 박수를 치며 흥얼흥얼거렸다. 주정훈 군이 바이올린으로 ‘아빠의 청춘’과 ‘징글 벨’을 연주하자 환호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혈액암에 걸린 A어린이, 간 종양을 앓고 있는 B어린이 등도 병실에서 나와, 공연을 보는 오늘만큼은 표정이 매우 밝았다. 서울대병원 황용승(55) 소아진료부원장은 “어린이 환자를 위한 일반인의 공연은 많지만 이번처럼 비슷한 처지의, 몸이 불편한 어린이들끼리 힘을 북돋아 주는 공연은 의미가 훨씬 클 것”이라고 말했다.
박원기 기자 o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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