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산’이라는 말의 느낌은 잉여의 풍성함보다 파장(罷場) 스산함으로 다가온다.
이 옹졸한 감각의 편향은 어쩌면 삶에 대한 근원적인 태도, 곧 염세니 비관이니 패배니 하는 것들에의 경향적 도취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또, 뼈빠지게 바둥거린들 대차대조표의 차변(借邊)은 언제나 왜소했다는 역사의 실증적 교훈, 그 어두운 결산의 시간을 이어왔던 가난한 한숨들이 응결된 결정일 수도 있다.
그것이 구조적 모순에 기인한 것이었다느니, 운명의 장난이라느니 하는 분석과 분노와 체념의 말들이 그 스산함을 중화하지 못한 것도 부인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바둥거림은 생명의 유지ㆍ전승을 위해 이어져왔고,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고 그럴 기미도 안 보이는) 그 모순적 구조를 유지ㆍ확대 재생산해왔다. 그것은 삶의 본질, 생명의 뿌리가 필연적으로 보수의 우리 속에 갇혀있음을 서글프게 확인시켜준다.
여기서 문학은 언제나 전위였다. 문학은 늘 보수의 경계에 서서 그 중심에 앉아 시시덕거리는 역사에 맞서 혁명을 충동했고, 스스로를 부정하며 전복과 재생을 잉태하고자 몸부림쳐왔다. 문학은 그 변화의 격랑을 여린 몸의 삿대질로 뒤벼 일구고, 목청을 찢어 피를 토하면서도 가망 없는 희망의 노래를 불러왔다. 세상과의 불화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문학이야말로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문학의 길이 시지푸스의 운명으로 환유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중력의 무게를 버텨 올리는 시지푸스의, 승승장구의 시간들이 그 끝없음으로 하여 끝내 져야 할 운명이듯, 그래서 핏발 선 안구와 뻐근한 근육을 풀 도취의 휴식(결산)이 가당찮은 사치이듯, 문학의 결산도 원칙적으로는 무의미하며, 스산함조차 과외의 느낌이다.
다만, 신의 단조로운 노역과 달리 인간의 노역(문학)은 숱한 크고 작은 상처로 제 몸의 무늬를 변화시키며 이어지는 것이어서, 거기에는 ‘흉터로서의 풍경’이 있다. 하여 문학의 결산은 지난 1년의 소중한 상처와 흉터의 결을 더듬는 것으로 대신해도 좋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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