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한 경찰간부가 사표를 썼다. “학생과 경찰이 원수처럼 돼 화염병과 돌이 난무하고 있는 현실에 비애를 느낀다”는 게 사퇴의 변이었다. 그의 탄식대로 학생 시위대와 진압경찰의 공방전은 생사를 건 ‘전투’였다. 시위현장을 보고 있으면 “저러다 죽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실제 이한열 이석규 강경대 김귀정 노수석 류재을 등 많은 학생과 경찰이 최루탄과 곤봉, 화염병에 희생됐다. 그 당시 무탄무석(無彈無石), 무석무탄(無石無彈) 논쟁은 후진적인 시위문화를 상징했다.
▦살풍경한 시위모습은 민주화 정부가 들어서고 한총련 등 운동권 세력이 약화하면서 달라졌다. 김대중 정부 시절 경찰은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시위현장에는 가벼운 화장을 한 여자경찰관이 배치된 이른바 ‘립스틱 라인’이 등장했다. 최루탄 업체는 거의 도산하고 화염병도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IMF체제에 따른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상황은 바뀌었다.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과 농산물 개방의 직격탄을 맞은 농민들이 시위의 전면에 나섰다. 생계가 걸린 시위인지라 이들의 분노와 절규는 처절했다.
▦ 지난달 15일 서울 여의도 농민시위에 참가한 농민 2명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잇달아 숨졌다. 한 집회에서 두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은 군사독재시절에도 없던 일이다. 그런가 하면 홍콩 WTO 각료회의 반대 시위현장에서 폭력시위를 벌인 우리나라 원정시위대가 무더기로 경찰에 연행돼 곤욕을 치렀다.
최루탄과 화염병은 사라졌어도 시위문화는 10여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최루탄을 방패가 대신하고, 화염병은 각목과 돌멩이로 대치됐을 뿐이다.
▦극심한 양극화와 정치대립이라는 자양분이 있는 한 시위와 집회가 사라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유별난 시위문화를 개선할 때가 됐다. 2002년 여중생 사망사건 당시 평화로운 촛불시위는 전 세계에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홍콩시위에서도 해상시위와 삼보일배 등은 홍콩 시민들에게 호감을 남겼다.
경찰의 감정적인 진압방식이 달라져야겠지만 시위대의 준법의식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불상사를 막기 위한 보다 안전한 시위진압 장비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평화적인 시위문화가 정착되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희생과 고통이 따라야 하는 걸까.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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