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한국영화는 성공했다. 지난해에 이어 시장점유율 55%. 11일까지 서울 관객만 2,538만여명으로 연말 ‘태풍’과 ‘왕의 남자’를 빼고도 지난해보다 0.1%나 늘었다(IM픽처스 자료). 초반 투자위축과 몇몇 대작들의 흥행실패로 흔들렸던 한국영화를 성공과 희망으로 이끈 승리자들은 누구일까. 영화평론가들의 추천으로 각 분야에서 선정했다.
*도움말 주신 분 : 김시무 심영섭 양윤모 전찬일 조혜정 조희문
▲ 배우 황정민 강혜정
배우는 연기로 말한다
이견이 없다. 양과 질에서 올해는 ‘황정민의 해’였다. 투박하고 겸손하고 뭉툭해 보이는 이 배우는 스스로 스타가 아님을 고집함으로써 스타가 됐다.
‘여자, 정혜’ ‘달콤한 인생’(대종상과 대한민국영화대상 남우조연상) ‘천군’ ‘너는 내 운명’(청룡영화상과 대한민국영화대상 남우주연상)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로 이어지는 5편의 출연과 기꺼운 조연. 그 스타답지 못한 다작 속에서 그는 다양한 캐릭터, 깊고 강한 연기를 심음으로써 최고 배우가 됐다.
그의 성공은 ‘마파도’나 ‘내 생애…’ ‘웰컴투 동막골’에서의 조연급 연기자들의 부상과 함께 올해 일부 인기스타와 그 매니저들의 과도한 출연료와 지분요구에 몸살을 앓았던 한국영화에 중요한 의미를 던졌다.
얼굴과 이미지가 아닌 실존 연기와 비록 조연급이지만 개성을 살린 매력적 구성의 영화제작이 스타지상주의의 대안으로 떠올랐고, 관객까지 그 선택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영화에서 황정민 같은 배우의 등장은 놀라운 일도, 새로운 모습도 아니다. 얼굴보다는 연기로 승부하는 남자배우는 거의 2년을 주기로 계속 이어져왔다.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가 그랬다. 황정민은 그 뒤를 이은 셈. 이들은 연극에서 연기 폭과 깊이를 쌓았고, 조연에서의 강렬한 이미지를 발판으로 주연으로 치고 올라와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저력을 발휘했다.
황정민 역시 2001년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달콤한 인생’까지 대여섯편의 영화를 조연으로 보냈다. 그 과정이 있었기에, 아직도 ‘일개 배우 나부랭이’로 자신을 소개하고, “배우는 수많은 스태프가 차려 놓은 밥상을 먹기만 하면서 스포트라이트는 혼자 받는 미안한 존재”라고 말하는 황정민을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친밀하게 동일시가 가능한 실존적 존재로서 좋아하고 받아들이게 하는지 모른다.
‘실존적 존재’란 점에서는 강혜정도 비슷하다. 이 여배우는 이미 스타인 이영애의 카리스마와 신비주의와는 정반대편에 서 있고, 비슷한 느낌의 선배 전도연보다는 덜 배우다운 곳에 서 있다.
그의 이런 태도가 ‘쓰리몬스터- 컷’ 의 위험한 아내, ‘연애의 목적’의 교사, ‘웰컴투 동막골’의 열일곱 살 미친 소녀 등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더구나 그것으로 흥행성까지 얻음으로써 관객은 올해 강혜정이란 배우를 가슴 속에 각인했다.
▲ 감독 방은진
감독으로 성공한 여배우
이 시점에서 ‘감독’ 방은진의 존재는 소중하다. 제작, 마케팅 등 영화의 다른 분야와 달리 이 땅에서 유독 여성감독으로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은데, 더구나 배우 출신으로 이만큼의 역량을 보인 사례가 한국영화사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데뷔작 ‘오로라공주’가 빼어난 작품이란 말은 아니다.
구성이나 묘사 방식에 아쉬움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 전체에서 보여지는 연출의 에너지였다. 그는 드라마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뚝심을 보였고, 그 에너지를 잘 다듬기만 하면 앞으로 좋은 작품이 나오리란 기대를 갖게 해주었다.
‘오로라공주’는 지금까지 여성감독 대부분의 작품들이 만들어 놓은 선입견을 깼다. 여성에 대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여성주의에 대한 강박이 없고, 마치 여성영화의 전범인 양 지켜온 정적이고 관조적인 태도도 버렸다.
이 새로운 도전 덕분에 잘 짜인 이야기가 아니지만 ‘왜 그럴까’ 궁금해하는 호기심에 의존하고, 그 호기심이 다소 약했지만 ‘오로라공주’는 상업적으로도 어느 정도(관객 약 100만명) 성공할 수 있었고, 방은진은 여성영화인들(올해 여성영화인상)과 평론가들(영평상 감독상)에게 박수를 받았다.
그는 감독이 된 이유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여러 관계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혈연 간이든, 타인 간이든 또 그 관계가 회복되든, 부서지든 그것을 반추하는 영화. 문제는 더 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전략이다. 이를 무시한 자기함몰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방 감독 역시 잘 알고 있다.
“더 쉽고, 따뜻하고, 재미있어 누구나 좋아하는 길로 가겠다”고 하니 한번 지켜볼 일이다.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밀고 가는 성격이니까.
▲ 제작자 장진
제작자? 감독? 행복한 고민
연극 연출가로서 장진은 탁월하다. 그러나 감독으로서 장진은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 연극적인 재능이 늘 발목을 잡아왔다. ‘킬러들의 수다’ 도 ‘아는 여자’도 그랬다. 올해 ‘박수칠 때 떠나라’도 경찰서 취조실 공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연기대결이 장진의 연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한계를 알기에 ‘웰컴투 동막골’은 감독을 신인 박광현에게 맡긴 것일까. 영화 자체로 보면 직접 연출을 안 한 것이 너무나 행운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연출은 공간과 시각이 넓고 화려한 스케일이 큰 영화에는 더더욱 위험해 보인다. ‘…동막골’만 봐도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다분히 연극적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장진 표(表) 영화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나마 직접 연출하지 않고 제작자로 한발 물러섬으로써 영화적 감각을 살릴 수 있었다. 누구보다 개인 파워와 틀이 강한 장진으로서는 그 틀을 조금씩 넘어보는 제작자로서의 가능성을 찾은 셈이다.
▲ 투자ㆍ배급 쇼박스
작품성이 흥행을 담보하다
3,300만 명. 올해 쇼박스가 배급으로 끌어들인 영화 관객수다. 전체의 30%에 가깝다. 설립 3년 만에 배급시장 1위와 단일배급사로서 흥행 1~3위( ‘…동막골’ ‘가문의 위기’ ‘말아톤’) 석권. 더구나 세 작품 모두 투자까지 맡아 최고 수익률까지 올렸다. 쇼박스가 자체적으로 진단한 성공요인은 3가지.
영화의 본질을 중시하는 문화, 기획단계부터 배급까지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한 제작사와 의 파트너십, 전문지식을 가진 구성원들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애정. 이것이 충무로 편견을 깨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해 ‘말아톤’ 이 나왔고, ‘…동막골’을 더욱 영화적이게 했다.
쇼박스가 한국영화에 준 또 하나의 선물은 ‘시나리오가 아무리 좋아도 A급 배우가 안 나오면 잘 투자하지 않는 관행’을 없앤 것 이다. 쇼박스 스스로 아이디어가 좋고 연출의 짜임새와 감동이 있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음을, 스타가 있어도 그것이 없다면 대중과의 소통에 실패함을 자기 영화인 ‘말아톤’ ‘…동막골’과 ‘미스터 주부퀴즈왕’ ‘소년 천국에 가다’로 증명했다.
이대현 대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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