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처음 본 건 1966년 작 ‘당나귀 발타자르’였다.
그 영화를 보기 전에 나는 주인 잃은 당나귀의 생애를 건조하게 추적하며 신과 구원의 문제를 천착하는 듯한 그 고상하고도 이상한 영화의 감독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다. 영화공부를 하겠다는 친구의 자취방에서 빈대 붙듯 뒹굴며 친구가 틀어놓은 비디오를 보다가 우연히 마주친 당나귀의 눈빛이 하도 서늘하게 느껴져 시선을 뗄 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재미라고는 눈곱 만큼도 없는 그 흑백화면을 두 시간 가까이 하품 한 번 않고 들여다보고 있는 스스로가 놀라워 이후 오랫동안 야릇한 이물감 같은 게 느껴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십대 후반, 암울한 중에 그나마 찬란(?)하게 남아있는 백수시절 기억 중 하나다.
발타자르를 다시 만난 건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시청률과는 하등 상관없을 법한 그 영화를 교육방송에서 틀어준다기에 며칠 동안 벼르다가 다시 보게 되었다. 처음보다는 다소 지겹다고 느꼈지만, 잠깐이라도 화면에서 눈을 떼면 불행한 당나귀의 운명이 공연히 내 탓으로 여겨질 것만 같은 이상한 가책이 드는 게 신기했다.
그러면서 화면 바깥의 나는 고사하고 화면 속의 누군들 당나귀의 삶에 완전한 희망과 구원을 줄 수 있겠는가 싶은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그 순간 당나귀에게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참으로 가혹한 심정이었지만,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의 운명이 다 그런 것이 아니겠냐는, 비관도 낙관도 아닌 그저 엄밀하고 정확하기만한 우주의 물리적 법칙 하나를 선취한 듯한 이상한 고양감이 느껴졌다. 그게 사람을 더없이 차갑게도 뜨겁게도 할 수 있는 모종의 영적 직관의 결과라는 건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 깨달은 사실이다.
그 후, 내가 더 챙겨본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는 ‘무셰트’ 와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 단 두 편뿐이다. 간단하게 감상을 밝히자면 굉장히 심심하고 나른했음에도 불구하고 눈 부릅뜨고 볼 수밖에 없는 긴장감이 가득했다는 요령부득한 말로 요약이 가능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직접 각색했거나 주제를 빌려 연출한 ‘몽상가의 나흘 밤’이나 ‘소매치기’ 등의 작품에도 관심이 갔으나 영화에 관한 한 게으름과 무심함으로 초지일관하는 나의 속성상, 적지 않은 발품과 집요한 관심을 요구하는 그 작품들은 아직도 내겐 요원하기만 할 뿐이다.
따라서 난데없이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들먹이며 내가 진정 말하고 싶은 건 영화와는 별 상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고백건대 나는 브레송의 영화보다는 훨씬 나중에 읽게 된 그의 짤막한 메모들에 더 관심이 있다. 이 글은 그러므로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오일환, 김경은 옮김, 동문선)을 읽고 떠오른 순전히 개인적인 단상들을 무질서하게 나열하는 방향으로 흐를 것이다. 로베르 브레송의 짧은 글들은 마치 실체 없이 물 위에 파문을 일으키는 바람처럼 사유의 잔주름들을 수시로 펄럭이게 한다.
고다르 등의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에 의해 진정한 영화의 발견자로 추앙 받는 브레송의 영화관은 지금 익히 알고 있거나 작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영화적 형식과는 많이 다르다.
정교한 스토리구조와 극적인 연기, 현란한 볼거리와 다채로운 사운드로 구성되는 현재의 영화는 브레송이 생각한 소위 ‘시네마토그래프’와는 대척점에 놓여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 미국 영화의 주류에서 형성되었던 그러한 영화적 형식을 브레송은 ‘끔찍한 연극적 습관’이라며 도리질 치듯 외면한다.
아울러 브레송은 그런 영화를 자신이 생각하는 ‘시네마토그래프’와 구별하며 ‘시네마’라 명명한다. 브레송은 ‘영화 작품은 연극 무대에서 보여지는 듯한 스펙터클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스펙터클은 뼈와 살로 된 현존이 요구되기 때문’이라는 말로 ‘시네마토그래프’와 ‘시네마’의 차이를 요약한다.
요컨대 영화는 연극 무대에서처럼 실제 인간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는 게 아니라 마치 미술작품을 찍은 사진들처럼 ‘사진적 복제’에 의해 꾸며진 것만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 조각이나 화폭이 가지고 있는 ‘힘과, 가치와, 가격에 훨씬 못 미치’고,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때문에 그건 결코 진실을 비추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꾸며진 감정들 위에 삶이 표절되는 것’일 뿐이다. 브레송이 카메라를 통해 직시하고자 했던 건 어떠한 꾸밈도 없이 그 자체로 놓인 사물들의 표면이다.
표면을 본다는 말에는 은은한 역설이 숨어있다. 그건 혼탁한 감정의 대입이나 투과 없이 오로지 정신의 순결과 육체의 밀도를 통합해 사물의 궁극을 투사해내는 결기와 끈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내면이란 표면 속에 감춰진 이면이 아니라 표면들 간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한 내면을 브레송은 ‘수년간의 천착 끝에 종국에 가서야 깨닫게 되는 일종의 미니멀리즘’이라 말한다. 이러한 브레송의 영화관은 언어의 물리적 움직임과 리듬 등에 충실함으로써 사물을 사물 자체의 언어로 지각하려 했던 프랑스 시인 프랑시스 퐁주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비슷한 역사적 배경(브레송은 1907년 생이고 프랑시스 퐁주는 1899년 생이다)과 지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형성된 두 예술가 사이의 공통점이 응당 필연적인 듯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두 명을 한정된 지면에서 통째로 운위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자기 앞에 놓인 사물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그것에 몰입함으로써 사물이 스스로의 언어로 자기자신을 표현해내는 걸 시의 궁극이라 여겼던 퐁주의 시 세계를 참조해서 브레송의 영화를 재음미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실제로 브레송은 영상을 단어처럼 취급하고 배열한다). 내가 아는 한 그것들은 극도의 감정적 절제와 순수한 사물의 자기정화에 의해 발생한 소위 ‘순수예술’의 극점들이다.
여기서 ‘순수예술’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몰역사적인 편견과 오해를 새삼 곱씹어 보자.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의도의 유무와는 별개로 예술의 궁극은 삶의 본연적 질서와 세계의 얼개를 통찰해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순수하다. 그 순수를 최대한 단순화시켜 반대말을 찾자면 허위나 가식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순수는 때 한 점 묻히지 않은 가공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때와 허물을 그 자체로 명징하게 사물화하여 나타내는 진실성과 자기반성적인 솔직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러한 순수성이 정직하게 발현된 예술은 삶과 세계의 질서로부터 이탈되기는커녕 그 모든 것의 심급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발언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무엇보다 순수하지 못하고 비참여적인 예술은 박물관이나 편협한 아카데미에 갇혀 느끼한 헛웃음이나 흘리고 있는 그 숱한 예술을 빙자한 화환들이다.
브레송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들이야말로 ‘사진적 복제’의 산물들로서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예술은 오히려 만들어진 아름다움을 비껴감으로써 숨어있는 아름다움의 뿌리를 만지게 하는 과정 자체에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
나의 편협하고도 완고한 상식으로 보건대 예술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브레송의 단상들은 내게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냉엄하고도 엄밀한 지침서와도 같다.
이 말은 브레송의 영화 이론을 내가 곧이곧대로 추종하거나 절대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앞서 브레송 영화들을 본 감상을 얘기하면서 ‘요령부득’이란 말을 했거니와 반 세기 전에 만들어진 그의 영화들은 영화 전문가들의 온갖 상찬과 끈질긴 분석에도 불구하고 나의 경박하고 변덕스러운 감각이 견뎌내기엔 자못 힘겨운 요소가 많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보다 자극적이고 현란하고 극적인 효과를 은연중 기대하면서도 정작 그런 장면이 나온다면 분명히 실망하고야 말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동시에 드는 것인데, 그 상극된 감정에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긴장감이 내가 브레송의 영화에서 느낀 감상의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내게 브레송의 작품은 영화에의 전면적인 함몰을 제어하면서 무심하게 흘러가는 영상들을 통해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세계와, 세계가 감추거나 드러내고 있는 온갖 진실들의 역학관계를 한꺼번에 아울러 고찰하게 만든다. 그건 흡사 거울과도 같지만, 그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역상이 아니다.
나와는 전혀 닮지 않은 순수한 현존으로써의 타인이 늘 그렇게 존재해 왔던 것인 양 무심하게, 갑자기 서 있을 뿐이다. 그는 불편하지만, 그를 보지 않으면 나는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힘듦을 기꺼워하며 그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써 내가 가진 무언가를 쉼 없이 해야 함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내게 브레송의 글과 영화는 삶의 태도를 냉엄하게 적시해주는, 자주 보고 싶지 않으나 늘 그리운 어떤 사람을 닮았다.
시인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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