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는 음모론을 곧잘 들고 나옵니다. 적어도 축구에선 그렇습니다. 12월 10일 열린 독일월드컵 조 추첨에 대해서도 이탈리아의 한 방송국이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주최측이 조 추첨 과정에 농간을 부려 ‘아주리 군단’이 수렁에 빠졌다는 내용입니다. 조를 정할 때 항아리에는 뜨거운 공과 차가운 공이 들어있어 온도차를 이용해 입맛대로 상대 국가를 선택할 수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세계의 반응은 썰렁합니다. 조 추첨을 했던 독일 축구영웅 마테우스는“이탈리아 사람들은 미쳤다”고 언성을 높였고, 대부분 국가들은 가뜩이나 최근 월드컵 전적이 부진한 마당에 FIFA 랭킹 2위 체코와 8위 미국 등 강팀이 포진한 죽음의 조(E조)에 배정된 데 대한 푸념으로 여기고 있답니다.
이탈리아는 한일월드컵 16강전에서 한국에 패한 뒤에도 음모론을 제기했고, 유로 2004 때도 8강 진출에 실패하자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의 '바이킹 담합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이탈리아는 왜 음모론에 집착할까요. 3번이나 월드컵 우승컵을 안았던 축구 대국이 근거를 댈 수 없는 주장을 함부로 폈다간 국제적인 망신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터인데 말입니다.
‘축구는 세계를 어떻게 지배했는가’(말글빛냄 발행)라는 책을 보면 감이 잡힙니다. 플랭클린 포어란 미국 기자가 세계 각국을 돌며 축구시장의 안과 밖을 입체적으로 분석한 책입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수비 형태인 카테나치오(빗장 수비)를 주목하면서 항의와 책략이 승부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단언했습니다.
논리는 이렇습니다. 빗장 수비로 득점이 줄어들면서 심판의 판정이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됐고, 심판은 AC밀란이나 유벤투스 같은 정계 재계에 엄청난 영향력이 있는 거대 구단과 더욱 유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바람에 선수들은 한일월드컵 당시 보았던 것처럼 심판에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스럽게 어필을 하고, 심판 매수와 승부 조작 같은 축구 스캔들이 빈발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탈리아에서 음모론이 나오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국내 경기에서 뒷거래가 횡행하고 있는 터인데 더 큰 시장인 월드컵의 조 추첨에서도 뭔가 수작이 없을 리 없다는 것이지요. 지저분하고 불투명한 국내 사정이 이탈리아 축구팬을 음모론에 탐닉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음모론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지난달 22일 MBC TV가 PD수첩이란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황 교수 연구에 의문을 제기한 이후 좌파들이 황 교수를 침몰시켰다는 종류의 음모론이 퍼지며 황 교수를 지키자는 여론이 득세했습니다.
16일 황 교수와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이 맞불 기자회견을 한 이후에는 황 교수가 일부 조작 사실을 시인해서인지 황 교수 개인보다 미국 혹은 유태인을 중심으로 한 국제 음모에 맞서 국익을 지키자는 쪽으로 확대 재생산됐습니다.
일부 언론과 네티즌들이 앞장서서 부채질했다는 비난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이라기보다 파문이 몰고 온 여파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정부가 황 교수에 대해 파격적인 지원을 하고 낯뜨거울 정도로 찬사를 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상식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검증도 소홀히 한 것이 음모론을 더 키웠다고 봅니다. 음모론은 석연치 않고 불투명한 대목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기자는 음모론이 항상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혼내줄 속셈으로 퍼뜨리거나 뜬금 없이 의혹을 부풀리는 따위도 있겠지만 사실로 판명 난 도청의혹에서 보듯이 정부나 특정 조직이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음모론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음모론은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없을 때 효력이 있습니다. 진상조사가 진행중인만큼 조만간 실체가 밝혀져 음모론의 생존토대가 사라지기를 기대해봅니다.
김경철 체육부장 k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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