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 근거’를 들이대며 우리나라에 대해 쇠고기 수입재개 압력을 넣고 있는 미국이 정작 한국산 축산제품에 대해서는 ‘자국 규정’을 들어 수입을 금지하는 등 부당한 일방주의적 통상자세를 고수해 거센 비난을 사고 있다.
19일 농림부 및 관련업계에 따르면 미국은 쇠고기를 다시 수입해야 하는 이유로 ‘과학적 근거’를 들고 있으나 막상 우리나라 축산물에 대해서는 자의적인 틀을 적용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내세우는 과학적 근거란 국제수역사무국(OIE) 지침이다. 이 규정은 “척수와 뇌를 제거한 30개월령 이하 소의 살코기는 광우병 위험이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미국은 반면, 우리나라 축산 농가들의 관심 품목인 가공 삼계탕에 대해서는 자국 규정을 들어 수입을 금지한 상태다. 우리나라 몇몇 업체에서 생산 중인 삼계탕은 레토르트(retort) 형태로 가공해서 수출된다.
레토르트란 조리 후 용기에 넣어 다시 한차례 고온에서 살균한 제품으로 식품 위생상 문제가 발생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런데도 미국 측은 우리나라 닭 사육 농가가 자국의 위생 규정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레토르트 삼계탕을 닭 생고기와 비슷한 수준으로 규제,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농림부 관계자는 “최근 레토르트 삼계탕의 대미 수출 절차를 시작해 관련 서류를 제출했다”면서 “미국은 쇠고기 수입에 우리가 불필요하게 많은 서류절차를 요구하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훨씬 안전한 레토르트 삼계탕에는 가공 단계마다 방대한 서류를 제출하라고 주문해 곤혹스러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국계육협회 한형석 회장은 “OIE 규정만 적용한다면 가공 삼계탕을 수입 금지할 이유가 없다”면서 “삼계탕 수입 금지는 경우에 따라 유리한 잣대를 들이대는 미국의 전형적인 무역 횡포”라고 밝혔다.
실제로 축산물 수입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도 레토르트 삼계탕을 다량 수입하고 있어 안전성을 이유로 수입을 금지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다. 일본에 대한 레토르트 삼계탕 수출은 1996년 102톤, 2000년 217톤에서 올해(11월 말 기준) 466톤을 기록할 정도로 급증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개별 업체의 신청을 받아 1999년 25톤, 2001년 4톤을 단발성으로 허용한 후 가공 삼계탕 수입을 전면 금지한 상황이다.
농림부 박홍수 장관은 이 같은 상황을 감안, 지난 14일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린 홍콩에서 미 농무부 장관에게 “삼계탕의 대미 수출이 조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국한우협회 남호경 회장은 “미국은 우리에게 쇠고기 수입을 과학적 근거가 아닌 정치적 잣대로 이용한다고 비난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나라는 오히려 미국”이라고 강조했다.
남 회장은 “유럽에서 광우병이 발생했을 때 미국은 이 병이 발생한 나라의 쇠고기는 모두 믿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며 “그러나 막상 자국에서 광우병 감염 소가 발견되자 ‘30개월령 이하는 안전하다’로 입장을 180도 돌렸다”고 비난했다.
광우병 발생 빈도가 미국보다 높은 유럽 국가들은 미국 측의 이 같은 요청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고 결국 OIE 규정이 올해 5월 바뀌게 됐다는 설명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수출시장 문호를 넓히기 위해 심지어 관련규정을 바꾸도록 압박하는 사례까지 있다. 대표적인 예가 ‘고속도로 오토바이 통행 허용’이다.
관련 업계의 끈질긴 요청에 미국 정부는 지난해 4월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미국 오토바이는 안전한 고속도로 운행을 위해 설계됐음에도 한국만 기종에 상관없이 오토바이 통행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면서 관련 규정을 ‘재검토’ 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서 물의를 빚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문제는 20일 미 농무부 차관이 우리 농림부를 방문하는 것을 시작으로 양국간에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간다.
김신영 기자 ddal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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