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앞에 서면 한없이 막막해졌다. 작가로서 내공을 쌓아보겠다며 건너간 타국 땅. 평면미술의 관념성에 절망할 때면 말없이 붓을 놓고 도서관이나 허름한 서점을 찾았다.
서가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있거나 그저 책을 들치며 배회하는 시간 만은 ‘나만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일상의 실천이 곧 예술’이라는 각성에 도달했다. 작가 백종옥이 책을 통해 얻은 자유와 주제의식을 개인전 ‘나의 도서관’을 통해 선보인다.
서울 조흥갤러리에서 전시중인 ‘나의 도서관’전은 한 미술가의 책에 대한 구애이자 진지한 성찰의 결과물이다.
우선 작가는 책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탈리아 초현실주의화가 기리코에게서 영향을 받은 ‘이름모를 풍경’에서 작가는 거대한 바벨탑처럼 서있는 서가와 책 사이에 두 다리만 보이게 둘둘 말아놓은 자화상을 배치한다. 인간 존재에 미치는 책의 압도적인 영향력을 상징한다.
설치작품 ‘자라나는 기둥’에서는 방 한가운데서 하늘을 향해 자라나는 하얀 책장을 보여준다. 책장의 표면은 자작나무처럼 채색됐다. 자작나무는 바이칼 지역 원주민 부리야트족의 민간설화에서 하늘과 인간을 소통하게 해주는 신목(神木)이다.
애정은 대상에의 몰입과 함께 두려움을 낳는다. 설치작품 ‘나의 도서관’에서 작가는 책의 물신화(物神化)를 말한다. 형형색색으로 물들여진 책은 서가에 꽂히는 대신 노끈으로 꽁꽁 묶인 채 놓여있다.
화려한 수사로 얼룩진 책과 표피적 책 읽기에 대한 자성이 담겼다. 머리 없는 조립인형이 가느다란 끈 하나로 책과 연결된 채 걸어가는 드로잉이나, 거대한 책 앞에서 한없이 작고 위축된 독서가의 이미지 등은 인간 욕망의 집적체로서 책의 모습을 서늘하게 전달한다.
작가마다 일상적 체험과 환상이 만나 예술을 배태하는 지점은 다르다. 백씨에게는 그것이 책, 혹은 서가이다. 그는 “지식의 표상이자 욕망의 집적체로서 책이 갖고있는 다양한 이미지와 인간 삶의 관계를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백씨는 1998년 독일로 유학, 2004년에 베를린예술대학교 조형예술과 마이스터쉴러(대학원) 과정을 졸업했다. 전시는 27일까지. 20일에는 오후 4시에는 일반 관람객을 대상으로 ‘작가와의 대화’ 시간도 갖는다. (02)722-8493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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