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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41) 吳章煥의 '병든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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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41) 吳章煥의 '병든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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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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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1918~1951)은 한국전쟁 중에 병사했다. 1947년 북으로 간 이래 1988년 월북 문인들의 작품이 부분적으로 해금되기까지 그의 이름은 남쪽 독자들에게 강제로 잊혀져 있었다.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의 가장 될성부른 청년 시인으로 꼽히던 그가 33세의 나이로 요절하지 않았더라도 한국문학사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은 오장환이 대단찮은 시인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장환의 문학적 조숙은 절친했던 친구 서정주에 견줄 만했고, 그가 세상에 남긴 시집들에는 당대의 가장 날쌔고 의젓한 문학 정신이 응축돼 있다.

그러나 오장환이 1951년의 병상을 떨치고 일어나 전후(戰後)까지 살아 남았다 해도, 그가 이미 선택해버린 역사는 그의 문학에 축복으로 작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1951년 이후의 오장환에게 그럴싸하게 남아있던 가상 운명은 둘이다.

하나는 전후의 숙청 바람에 휩쓸려 목숨을 잃거나 펜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가 해방기에 박헌영이나 임화와 맺은 친분은 이런 시나리오에 무게를 실어준다. 또 하나는, 소련 기행 시집 ‘붉은 기’(1950)에서 그 자락을 드리우기 시작한, 체제의 공식주의 문학에 온전히 동화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시인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체제에서 글 쓰기를 업으로 삼기로 했다면 그에게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어느 쪽이 되었든, 1951년 이후의 오장환이 한국 문학에 이바지할 바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을 1951년에서 조금 더 위로 올리면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도 있다. 만일 그가 해방기의 정치 바람에서 벗어나 있었다면, 그래서 시집 ‘성벽(城壁)’(1937)과 ‘헌사(獻詞)’(1939)의 데카당스와 설움을 ‘나 사는 곳’(1947)의 포실한 서정의 체에 밭으며 자족의 예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면, 요컨대 남쪽에 남았다면, 1951년 이후의 오장환은 서정주에 버금가는 시인이 됐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20세기 한국문학사는 천황제 파시즘에 부역하지 않은 대(大)시인을 기록하는 기쁨을 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되돌아보는 자의 유리함에 기대어 앞서간 자의 불민(不敏)을 탓하는 것은 얼마나 꼴불견인가? 무엇보다도, 해방기의 양심적 정신이 북에 이끌린 것은 거의 필연이었다.

그 시대의 평양에서 오늘날의 저 괴물 같은 체제를 내다볼 수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오장환은 월북하기 전까지의 글쓰기만으로도 한국문학사의 적잖은 페이지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

‘병든 서울’(1946)에 묶인 19편의 시는 오장환이 해방 이후에 쓴 것들이다. 시집이 나온 순서로는 ‘성벽’과 ‘헌사’에 이어 세 번째지만, 이듬해인 1947년에 간행된 ‘나 사는 곳’의 작품 대다수가 일제 말기에 쓰여진 터여서 ‘병든 서울’을 오장환의 네 번째 시집으로 치는 것이 예사다. ‘병든 서울’의 적잖은 작품들은 화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입장이 비교적 또렷한, 이른바 계기시(occasional poems)다.

‘8월 15일의 노래’라거나 ‘연합군 입성 환영의 노래’라거나 ‘3.1 기념의 날을 맞으며’ 같은 표제나 부제들이 그 계기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런 기념시적 성격과 정치 이데올로기적 경사가 심미적 감수성과 원만하게 깍지를 끼기는 어렵다.

‘병든 서울’ 역시 이 어려움을 날렵하게 해결하지는 못해서, 앞선 시집들에 견주어 그 언어들이 문득 버성겨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주머니를 바꾸었다고 해서 송곳이 뭉툭해지는 법은 없다.

시인의 재능은 기념시들에서도 의연히 빛을 내뿜으며 ‘병든 서울’을 해방기 정치 문학의 한 정점으로 만들었다. 거기에는, 해방과 함께 급격히 풀리기 시작한 정치적 태엽의 동역학 속에서 한 심미적 정신이 정치적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며 벌인 고투가 기록돼 있다.

시인은 해방을 병상에서 맞았고, ‘병든 서울’의 서문도 ‘서울대학부설의원 입원실에서’로 마무리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들이 병상에서 쓰여진 것은 아니다. 시인 자신임이 분명한 표제작 ‘병든 서울’의 화자는 “8월 15일 밤에 병원에서 울었다.” 해방의 기쁨 때문에 운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아픈 몸 때문에 만사에 시큰둥했던 화자에게 해방의 의미가 실감된 것은 그 날 밤을 지내고 나서다. “그러나 하루 아침 자고 깨니/ 이것은 너무나 가슴을 터치는 사실이었다./ 기쁘다는 말/ 에이 소용도 없는 말이다./ 그저 울면서 두 주먹을 부르쥐고/ 나는 병원에서 뛰쳐나갔다.” 이 화자 - 시인은 그 뒤로 날마다 밖으로 뛰쳐나가 감격 시대의 희망과 좌절을 노래했다.

8.15 덕분에, 그는 울어야 할 이유를, 살아야 할 이유를 또 하나 발견했다. “8월 15일, 9월 15일/ 아니 삼백예순 날/ 나는 죽기가 싫다고 몸부림치면서 울겠다./ 너희들은 모두 다 내가/ 시골 구석에서 자식 땜에 아주 상해버린 홀어머니만을 위하여 우는 줄 아느냐./ 아니다. 아니다. 나는 보고 싶으다./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하늘이....../ 그 때는 맑게 개인 하늘에/ 젊은이의 그리는 씩씩한 꿈들이 흰 구름처럼 떠도는 것을.......”

일제 하에서 아무런 정치 운동에도 몸을 싣지 않았던 데다 그 시절 간행한 시집들이 짙은 문학주의의 자장(磁場) 안에 있었다는 점을 들어, 해방기 오장환의 정치시들과 정치 활동을 시류 편승의 맥락에서 백안시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 시집들에 묶이지 못한 1930년대 후반의 장시(長詩) ‘전쟁’과 ‘수부(首府)’가 급진적 문명 비판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1937년 초에 발표한 어느 글에서 시인이 다음과 같이 제 정체성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입장 선회’에 대한 눈흘김을 거두어도 될 것 같다.“‘그는 시인이다’와 ‘그는 인간이다’ 하는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되겠느냐고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나는 ‘인간이 되겠다’라고 맹세할 것이고, 또 참다운 인간이 되려 노력할 게다.

시라든가 노래 혹은 춤 이러한 것은 우리 인생에서 뗄 수 없는 생활에의 한 태도이나 또한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나는 정상한 인간의 행로 가운데 문학의 길을 밟으려 한다”(‘문단의 파괴와 참다운 신문학’).

보들레르와 랭보의 그늘 아래서 시업(詩業)에 들어선 듯 보였던 이 19세 청년 시인에게, 뜻밖에도, “조선에 새로운 문학이 수입된 지 30년 가까운 동안 어느 것이 진정한 신문학이었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백조’ 시대의 신경향파에서 ‘카프’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그룹”이었다. 오장환에게 문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었고, 그의 정치 문학은 입장의 ‘선회’가 아니라 ‘노정(露呈)’이었다.

그래서, 그가 “아름다운 서울, 사무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아,/ 나라 없이 자라난 서른 해,/ 나는 고향까지 없었다”(‘병든 서울’)고 털어놓을 때든, “한 때, 우리는 해방이 되었다 하였고 또 온 줄로 알았다/ 그러나/ 사나운 날세에/ 조급한 사나이는/ 다시금,/ 뵈지 않는 쇠사슬 절그럭거리며/ 막다른 노래를 부르는구나”(‘찬가’)라고 한탄 속에서 싸움을 다짐할 때든, 그의 진심을 믿어도 될 것 같다.

“나에게는 울음뿐이다./ 몇 사람 귀 기울이는 데 팔리어/ 나는 울음을 일삼아왔다./ 그리하여 나는 또 늦었다”는 반성 속에서 “아 나에게 조그만치의 성실이 있다면/ 내 등에 마소와 같이 길마를 지우라./ 먼저 가는 동무들이여,/ 밝고 밝은 언행의 채찍으로/ 마소와 같은 나의 걸음을 빠르게 하라”(‘나의 길’)며 동도(同途)의 벗들에게 편달을 청할 때도 그렇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에서, “춤추는 바보와 술 취한 망종이 다시 끓”(‘이상 병든 서울’)는 서울에서, “내 나라의 심장 속/ 내 나라의 수채물 구녕/ 이 서울 한복판”(‘이 세월도 헛되이’)에서, 오장환은 “지난날의 부질없음/ 이 지금의 약한 마음”(‘공청으로 가는 길’)에 대한 겸연쩍음을 애써 지워내며, “우리는 어찌하여/ 우리의 원수를 우리의 형제와 우리의 동무 속에 찾아야 하느냐”(‘내 나라 오 사랑하는 내 나라’)고 한탄하며, 제 병약한 몸뚱이를 곧추세우며, 울고 노래하고 싸웠다.

그 울음과 노래와 싸움 속에서 해방기 문학과 정치가 만나고 엇갈리는 동안, 그가 사랑하는 서울은, 그가 되돌려 받은 조국은 골육상잔의 피바다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다.

▲ 어둔 밤의 노래

다시금 부르는구나

지난날

술 마시면 술들이 모여서 부르던 노래

무심한 가운데--

아, 우리의 젊은 가슴이 기다리고 벼르던 꿈들은 어디로 갔느냐

굳건히 나가려던 새 고향은 어디에 있느냐

이제는 병석에 누워서까지

견디다 못하여

술거리로 나아가

무지한 놈에게 뺨을 맞는다

나의 불러온

모든 노래여!

새로운 우리들의 노래는 어디에 있느냐

속속들이 오장까지 썩어가는 주정뱅이야

너조차 다 같은 울분에 몸부림치는 걸,

아, 우리는 알건만

그러면 젊음이 외치는 노래야, 너 또한 무엇을 주저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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