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저 많은 신춘문예 원고 봉투를 뜯고 분류하고 집계하는 일은 꽤 고되고 지루한 노동이었다. 봉투마다에 담긴 응모자들의 정성과 그들이 구축한 세계를 엿보는 일의 떨림은 처음 얼마간의 것일 뿐, 종이 먼지로 매캐해진 작업 공간 안은 이내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움직임만 남기 일쑤다. 빳빳한 종이와 철은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손을 할퀴기도 하고, 손끝에 물집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멍한 관성의 움직임을 멈칫 멎게 만드는 봉투들이 있다. 첨부된 메모나 편지의 어떤 글, 관록을 가늠케 하는 엄청난 원고의 양, 눈에 익은 국제우편 봉투 위의 지명과 이름…, 선물을 동봉한 봉투도 있다.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서 중고 서점을 경영한다는 중년의 모씨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일을 하며 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맺은 시와의 인연을 지금껏 끊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의 쪽지를 보냈고, 막 수능시험을 본 고3이라는 여학생은 소설 원고 첫 장에 “읽으시지 않을 것 같아서 글씨를 크게 쓴다”며 편지를 붙였다.
“어릴 땐 소설이나 시를 취미로 썼는데…입시 준비로… 이 기회에 다시 취미를 가지려고 응모합니다. 제가 쓴 작품이 유치해서 신춘문예의 명예를 손상시켰다면 죄송해요.”
올해 소설 최연소 응모자일 가능성이 높은, 수원의 한 중3 여학생은 “미흡하지만 열심히 쓴 글이니 성의를 생각하셔서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한다고, “제 글을 읽어주신 데 대한 조그마한 감사의 표시”라며 수필집 한 권을 보내왔다. 그는 감기 조심하라는 인사와 함께 “내년에 더 좋은 작품을 써서 꼭 응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달 국내 시전문 문예지로 정식 등단한, 미 캘리포니아주의 한 교민은 그가 현재 사는 페블비치와 고향인 경남 통영의 옛 풍경을 비교하며 향수의 일단을 피력한 편지를 동봉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故) 신기섭 시인의 명복을 빕니다”는 글을 원고 맨 위에 적어 보낸 응모자도 있었다. 고인은 지난 해 본보 신춘문예로 등단, 이 달 초 불의의 사고로 숨을 거둔 젊은 시인이다. 그가 떠난 뒤 고인의 홈페이지에는 네티즌들의 추모 글이 이어졌고, 많은 이들이 그의 시를 블로그며 미니 홈피로 옮겨갔다.
유고 시집 출간 움직임도 활발하다고 한다. 시인이 떠나면 세상의 모퉁이가 흔들리고, 그 무게 중심이 움직인다는 것을 그는 죽음으로 입증했다. 올해 신춘문예에 응모한 수많은 문학청년의 열정 역시, 지난 해의 그의 그것에 못지않을 것이다. 문학이 죽었다는 말은, 그래서 틀린 말이다.
원고 한 장 한 장이 아무런 구김 없이 심사위원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했다는 말로, 투고자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는 시 1,035명, 소설 467명, 희곡 126명, 동화 243명, 동시 196명이 줄잡아 8,000여 편의 작품을 보내왔다. 이는 지난 해(시 1,069명, 소설 465명)와 흡사한 수준이다. 당선자는 예ㆍ본심을 거쳐 내년 1월1일자 지면을 통해 발표되며, 본인에게는 12월25일 전후 개별 통지된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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