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을 벌금 00만원에 처한다. 피고인이 위 벌금을 납입하지 아니하는 경우 5만원을 1일로 환산한 기간 피고인을 노역장에 유치한다.”(법원 약식명령)
벌금은 당연히 돈으로 해결할 문제. 하지만 없는 사람들은 몸으로 때워야 한다. 십수만원부터 수백만원까지의 벌금을 내는 대신 노역장으로 가는 이들이 있다.
노역장이지만 구치소에서 일 없이 갇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실제로는 ‘00일 구금형’을 사는 것과 같다. 예비군 훈련 문제로 벌금형을 받은 기자는 벌금 일부를 미납, 11월23일부터 2일간의 노역장 유치 명령을 받았다.
#첫날 오전10시. 서울북부지검 호송출장소
노역장에 가기 전에 서울북부지검 호송출장소에서 잠시 대기한다. 속칭 ‘비둘기장’이다. 경찰이 휴대폰을 제외한 모든 소지품을 회수하고 유의사항을 일러준다. “저녁 6시까지 이곳에 있다가 성동구치소로 갑니다. 벌금을 내면 언제든 나가니까 빨리 가족에게 연락하세요.”
‘철커덩.’ 문이 닫혔다. 화장실이 딸린 7, 8평 방에 벌써 6명이 짐짝처럼 뒹굴며 잠을 자고 있다. 침묵의 무게에 눌려 몇 시간을 보내자 가로, 세로 10㎝의 구멍으로 1회용 도시락에 밥과 콩나물국, 김치 소시지가 담긴 점심식사가 들어온다.
“아저씨들은 어떻게 들어왔어요?” 어색한 침묵을 깰 요량이었는지 한 중년 남자가 밥을 먹다 허공에 대고 질문을 던진다. 머뭇거리던 이들이 하나 둘 입을 떼기 시작한다.
A(40대 중반ㆍ건강식품 영업사원)씨는 지난해 취중에 옆 손님을 때려 벌금 140만원이 나왔다. 돈벌이가 변변치 않아 생계를 잇기도 힘들어 부인과 헤어졌고, 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다고 했다. “사장이나 친구들에게 돈을 융통하려 했지만 ‘미안하다’고만 하는 거야. 에이, 그냥 몸으로 때워야지 뭐.”
“쉬러 들어왔어. 40일쯤 썩으면서 머리도 식히고, 이 기회에 담배도 끊고.” 폭행으로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은 B(49ㆍ공사장 일용직)씨가 태연한 듯 말문을 연다.
전과자인 그는 몇 년 전부터 공사장에서 일하며 형 대신 어머니를 모셨다. 하지만 2달 전부터 일감이 끊기고 노모마저 당뇨합병증으로 입원해 그 동안 모은 2,000만원을 다 써버렸다. 힘들다 보니 스트레스성 우울증 판정도 받았다.
“큰 형님네도 이제 어머니 좀 모셔 봐야지”라던 그는 이내 “형수님은 어머니 목욕도 제대로 못 시킬 텐데. 아무래도 며칠만 쉬다 나가야 할 것 같아”라며 ‘작심’을 접었다.
아들 철이(가명) 생각이 났는지 A씨가 휴대폰을 꺼낸다. “응, 철이 엄마. 안 좋은 일이 있어서 한달 동안 철이 좀 돌봐줘. 내 양복 주머니에 30만원 있으니깐 그거 꺼내 써. 정말 미안해, 부탁해.”
“전 근로기준법이에요.” C(31ㆍ공장 노동자)씨가 한숨을 내쉰다. 몇 해 전까지 조그만 가공공장 사장이었던 그는 2003년 은행 빚이 눈덩이처럼 쌓여 결국 파산했고, 이후 다른 공장에 취업해 겨우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그런데 옛날 직원들이 임금체불로 그를 고소해 5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마련)해.”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C씨가 피식 웃는다. 가족들이 돈을 마련하고 있는 모양이다.
D씨는 무면허운전, E씨는 폭행, F씨는 사기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고 했다. “분납도 안돼요? 사정 좀 봐줘요.” D씨가 경찰을 불러 통사정을 하자 여기저기서 불만이 쏟아진다.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같은 서민들이 몇백 만원을 어디서 금세 구하냐. 정부가 서민들 삥뜯는 깡패도 아니고.” “큰 도둑은 안 잡고 힘없는 서민들만 잡아들이냐.” “어떤 놈은 하루 노역 값이 1억원이 넘는다는데. 우린 5만원짜리 인생이야.” 푸념과 불만이 이어지며 2시간여가 지나자 경찰이 D씨를 호명하며 철문을 연다. 가족들이 벌금을 납부했단다. 1시간쯤 지나 E씨도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남은 사람들 사이로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오후 7시. 성동구치소 가는 길
구치소 이송시간이 되자 철문이 열리고 긴 밧줄에 1m 간격으로 꿰어 있는 수갑이 눈 앞에 있다. ‘철컥’하고 차가운 금속이 손목을 죈다.
대기하고 있던 호송차는 노역자들 뿐 아니라 양심적 병역거부자, 특수절도 등 형사범들을 태우고 30분을 달려 성동구치소에 닿는다.
철문 2, 3개를 지나 입소대기실에 도착, 신원확인-영치금 확인-신체검사-소지품 확인 절차를 거쳤다. 형사범은 고동색, 노역자는 파란색 수의로 갈아입는다.
간단한 저녁식사와 샤워. 밥그릇 3개, 수형자 번호와 방번호를 배당 받는다. 기자는 노역수 번호 528번, 방번호 4상(上)2방을 배정 받았다.
교도관은 방으로 인도하면서 현재 120여명의 노역수들이 60개의 거실(방)에 유치돼 있다고 일러준다. 교도관은 “노역장에선 하루 세끼 해결되고 병 치료도 가능해 일부러 들어오는 노숙자들도 있다”고 말했다.
방문을 열자 TV와 모포, 베개가 정리?놓여 있고, 출입구 맞은 편에 화장실이 붙어 있다. 2일간 노역장 유치를 받은 기자는 만기출소자로 분류됐다. 혼자였다.
모포를 깔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내리쬐는 불빛에 눈이 부시다. 교도관을 불러 불 좀 꺼달라고 하자 “감시를 위해 수면시간에도 불을 끄진 않고, 조도는 낮춰줄 수 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등을 돌려 잠을 청했다.
#이튿날 오전5시. 성동구치소
얼마쯤 지났을까. “528번. 집에 갈 시간입니다.” 시계를 보자 오전 5시. 구치소 보안과에 가서 소지품과 영치금을 돌려 받아 정문으로 향한다. 신원확인이 끝나고 정문이 열리는 순간 차가운 새벽 공기가 뺨에 닿는다.
안형영 기자 prometheus@hk.co.kr
■ "벌금대신 노역" 2년새 65%↑
벌금 대신 노역을 택하는 인원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11일 법무부에 따르면 전국 46개 교정시설의 노역장 입소자는 2002년 2만61명에서 2004년 3만3,212명으로 65% 늘었다.
노역 도중 벌금을 완납하고 나가는 사람도 줄어들어 입소자 대비 만기 출소자 비율은 2002년 31%(6,234명)에서 2004년 36%(1만1,908명)로 증가했다.
최근에는 벌금형 대신 이보다 중한 집행유예 선고를 호소하는 피고인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법원은 벌금형을 선고하면서 피고인의 하루 수입액 등을 감안, 벌금 미납시 노역장 유치 기간을 함께 선고한다. 일반적으로 하루 노역 대가는 5만원 정도이지만 벌금이 많은 경우 억대에 이르기도 한다.
아무리 벌금이 많아도 노역유치 기간은 3년을 넘을 수 없기 때문. 2004년 6월 법원은 손길승 전 SK회장에 대해 법인세 탈세 혐의로 벌금 400억원을 선고유예하면서 하루 노역 대가를 1억원으로 책정했다.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는 똑같은 죄를 범해도 소득에 따라 벌금을 차별화하는 일수벌금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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