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과학기술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문명의 질적 성격을 바꾸어 놓는 21세기에 한스 요나스(1903~1993)는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첨단과학기술과 기술의 산업화가 삶의 터전인 생태계를 황폐화하고, 생명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자연생명을 조작하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책임’을 철학의 주제로 삼은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는 ‘생명의 원리’에서 모든 생명은 살려고 애쓰는 존재라는 것을 철학적으로 정초하였다. ‘책임의 원칙-기술시대의 생태학적 윤리’에서는 생명이 저마다 살려고 애쓰는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생명에게 더 가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생명의 존엄성을 정당화하였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책임을 떠맡을 능력이 있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이 모든 생명과 그들의 미래까지도 책임 져야 한다는 내용의 총체적이고 지속적인 책임의 윤리를 제시하였다.
이제 ‘기술 의학 윤리’에서 그는 첨단과학기술의 도움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의료와 유전공학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책임의 윤리’ 관점에서 검토하고 있다.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인체실험, 유전자 조작, 동물복제와 인간복제, 복제인간의 권리, 생명연장 등등이 검토 대상이다. 특히 이 책의 제12장은 자연과학자, 정치가, 신학, 철학, 사회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기술문화의 가능성과 한계’를 주제로 한 공개 대담과 ‘자유에 대한 회의’ 인터뷰 내용을 담고 있다.
‘기술 의학 윤리’에서 요나스가 제기하는 입장이나 논점은 다음과 같다: 첨단과학기술은 그 영향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윤리의 검토를 받아야 한다.
전통윤리에 덧붙여서, 오늘날에는 새로운 윤리, 즉 오늘날의 문명적 상황을 적극적으로 반성하는 책임의 윤리와 덕목들(두려움, 겸손, 검소, 절제, 성스러운 것에 대한 외경심)이 요청된다. 첨단과학의 이론적인 탐구도 이미 엄청난 행위이다. 과학적 탐구행위에 대해서 우리는 그 연구 결과의 예측 가능한 파급효과를 물어야만 하고, 또한 질문 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과학적 탐구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지는 매우 어렵고 복잡한 문제이다.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인체실험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만약 인간복제가 실현된다면, 자연인간은 복제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지할 권리(자연인간처럼 자신의 운명을 모르고 살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이 권리를 박탈할 권리를 자연인간은 가지고 있지 않다.
생로병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해도 좋은가? 인간은 인간으로서 품위 있게 죽을 권리, 안락사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에게 요청되는 과학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예측 결과 앞에서 연구와 영향력 행사를 포기할 줄도 아는 겸손한 과학이다. 성스러운 것에 대한 외경심을 가진 과학이 어떻게 가능한가?
요나스에 따르면, 첨단과학기술 시대에 인간은 생태계와 인간의 도덕성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야 하며, 윤리적 이성이 과학기술적 오성에 종속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과학을 적대시 하지 않으면서, 과학과 기술이라는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통제력을 갖는 것이다.
우리들 개개인과 집단의 행위의 원칙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함께 책임을 떠맡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대화를 계속 해야 하고, 해답을 찾아야 한다.
요나스 자신은 이러한 작업을 인간생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인간 종의 인륜성의 차원에서 문제 제기하고 있다. 황우석 교수와 같이 탁월한 과학자들 덕에 우리 나라도 세계의 생명공학을 주도해갈 수 있다는 희망에 벅차 오르는 시점에서, 당장 눈앞에 주어지는 혜택과 현실적 필요와 공익의 유혹에 얽매이지 말고, 근본적으로 생명을 책임지는 학문탐구의 원칙, 행위의 원칙 등을 찾으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요나스의 입장에 동조하느냐 안 하느냐를 불문하고, ‘기술 의학 윤리’는 기술시대의 중요하고 구체적인 문제들을 검토할 수 있는 탄탄한 철학적ㆍ윤리적 토대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나아가 장기적인 안목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행위하고 결단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 준다.
● 과학윤리에 관한 책들
'기술 의학 윤리'말고도 '생명의 원리'(아카넷 발행) '책임의 원칙'(서광사 발행) 등 한스 요나스의 주요 저작은 몇 권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한정선 감신대 교수는 최근 번역되어 나온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의 '고통-의학적 철학적 치유적 관점에서 본 고통'(철학과현실사 발행)도 주제는 다르지만 같이 읽을만한 책으로 추천했다.
이 책은 100세의 가다머가 강연한 내용을 묶은 것인데, 가다머는 이 생애 최후의 강연에서 의사가 아니라 환자가 주체적으로 어떻게 고통을 극복할 것인가를 철학적으?설파했다.
요나스와는 거의 정반대의 논리로 생명공학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책도 읽어 볼만하다. 생명복제의 필요성에 적극 찬성하는 그는 국내 번역된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 발행) 등에서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하기 위한 획기적인 방법으로 현대과학기술의 총아인 생명공학을 적극 두둔하고 나선다.
과거에는 교육이라는 방식으로 인문학이 인간을 길들였다면, 앞으로는 생명공학이 인간을 선별하고 배양함으로써 인문학보다 오류가 적은 인간 만들기가 가능하다는 논지다. 물론 그에게는 "생명윤리를 배척하고 엘리트 인간을 사육하려는 '차라투스트라의 기획'을 감행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한정선 감리교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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