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창음악은 조화, 아름다움, 서정에 익숙하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 갑론을박의 시끄러운 논쟁, 비난과 옹호, 환호와 항변, 자못 근엄한 훈계와 이를 비웃는 냉소가 어지럽게 뒤섞인 가운데 별 볼 일 없는 소시민의 일상은 초라하게 어딘가에 처박혀 시들어간다. 이런 세상의 음악이 꼭 아름답고 서정적이어야만 할까. 합창은 왜 늘 이구동성인가. 더러 혼란과 갈등, 충돌과 해체의 소리가 더 정직하지 않을까.
작곡가 황성호(50.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는 좀 다르게 쓰고 싶었다. 18일 저녁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발표할 그의 작품 ‘비디오 칸타타’는 그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 작품은 1990년 나온 시인 하재봉의 시집 ‘비디오/천국’에서 뽑은 9편의 시로 만든,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이다. 네 편은 국립합창단의 위촉으로 작곡해 지난해 피아노 반주로 발표했다. 이 시집은 TV, 비디오, 방송 등 대중매체의 횡포, 도청과 몰래카메라, 거대한 도시 속 개인의 소외와 참담한 일상을 드러내는 시로 큰 화제가 됐었다.
공연을 알리는 인터넷 홈페이지(www.videocantata.com)에 띄운 작가 노트에 그는 이렇게 썼다. “풍요하고 정교한 대도시 속에서 소외와 패배에 찌든 작은 개인의 분노, 허무 그리고 일탈 욕구를 합창을 통해 집단 간증 고백처럼 외치고 흐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한 목소리로 곱게 노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터. 그는 낭송, 합창과 독창의 형식에 랩과 미니멀, 재즈적 요소와 현대음악을 뒤섞고 중간에 마치 광고처럼 영상이 포함된 전자음악 ‘TV 스케르초’(1995)를 끼워넣어 실험성이 강한 작품을 만들었다. 텍스트로 쓰이는 9편의 시는 ‘없다’ ‘시간이 없다’ ‘전화하고 싶다’ ‘TV는 폭발한다’ ‘TV는 알을 깨고 부화’ ‘내 뼈를 피리로 불며’ ‘동굴’ ‘귀향’ ‘태양의 물’이다. 합창단은 하나의 시구를 쪼개어 서로 다른 말로 뒤죽박죽 떠들기도 하고 랩을 중얼거리기도 한다.
“서울이 얼마나 시끄러운 도시입니까? 월드컵에 데모에 요즘 황우석 교수 사건만 해도 정말 시끄럽죠. 합창은 함께 노래하지만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에 도시의 다양한 소리를 담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죠. 이번 작품은 ‘세속’ 칸타타예요. 우리 삶을 보여주는 음악적 다큐멘터리라고 할까요. 우리의 문제나 고민을 끄집어내 망원경으로 증폭시켜 보여주는 것도 예술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디오 칸타타’는 하재봉 시인의 ‘없다’ 낭송으로 시작한다. “나무가 숲 속에/모래가 사막에/소금이 바다에/내가 세상에/없다 없다 없/다 다다 다다다 없//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없다 어느 날 아침 그대는 갑자기 해고되고/(이하 생략. 하재봉 시 ‘없다’의 첫머리) ‘없다 없다 없/다 다다 다다다 없’의 묘한 말놀이가 눈에 띄는 이 시의 낭송은 작곡가에 의해 전자음향적 실험으로 변모해 작품의 운을 뗀다.
“하재봉 시인의 시 자체가 아주 드라마틱해요. ‘비디오/천국’의 시들은 도시 속에 고립된 개인 정서를 헤비메탈 가수처럼 외치기도 하고 혹은 랩퍼처럼 웅얼거리기도 하죠. 그래서인지 시들은 문자가 아닌 소리 이미지로 느껴집니다. 숨가쁘게 편집된 뮤직비디오의 짧은 단편들처럼 리드미컬한 그의 시상과, 흥미로운 단어와 음성의 의미 교차가 작곡하고 싶은 욕구를 자극했죠.”
공연에는 국립합창단과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오케스트라 외에 독창자로 베이스 양희준, 바리톤 최현수가 참여한다. (02)3476-4303
오미환 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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