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장을 좋아한다. 형형색색의 원단이 빼곡하여 한복을 짓는 본견부터 원피스에 붙이면 폼이 날 레이스까지, 동대문 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어서 재미있다. 미군 부대 식량에서부터 머리핀, 도매 그릇, 갈치조림 집까지 갖춘 남대문 시장은 더 바쁘다.
한약재상들로 바글바글한 경동시장. 당귀 냄새가 폴폴 풍기는 거리를 걷다 보면 거리에서 늙은 호박을 통째로 팔기도 하고, 세워 둔 포장 마차에서는 잔술을 팔기도 한다.
청계천 뒷골목 중고 시장에 가면, 삼사만원 짜리 카메라, 20년 전 모델인 워크맨부터 낡은 기타와 아코디언에 깜장 교복 모자까지 진열 되어 있어서 향수를 자극한다.
생명력이 넘치는 것으로 치면 어시장이 최고다. 서울의 수산 시장만 가도 팔팔 뛰는 각종 생선을 구경할 수 있다. 요건 뭐에요? 조건 뭐에요? 묻고 구경하다가 만만한 놈을 골라내 그 자리에서 맛을 볼 수도 있다.
양식 도미가 성에 차지 않는 다면 산지(産地)의 어시장을 찾는 방법도 있다. 물론 이런 저런 여건이 가능할 때의 일이지만, 서해의 대하나 낚시로 건져 올린 남해의 감성돔은 현지 어시장에 가야 쉽게 볼 수 있으니까.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정박하는 배들은 물고기를 끝없이 풀고, 도매상인들의 떠들썩한 경매가 한판 몰아치고 가야 고요한 아침이 오는 어시장….
그제야 정신이 들어 허기를 느끼는 어시장 상인들은 국밥 한 그릇 뜨시게 말아서 자리 젖 반찬 삼아 한 술을 뜬다.
◎ 새싹 회 & 가다랭이 메밀 면
어시장에서 간택된 뒤, 동네 슈퍼마켓으로 들어오는 생선은 아무래도 그 선도가 다소 떨어지게 되어 있다. 요리 잘하기로 소문난 내 엄마는 손님을 초대 한 날이면 새벽같이 수산 시장으로 나를 데려 가곤 했다.
코를 찌르는 비린내에 도리질을 치며 시장 안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입구부터 버티던 나는, 집 앞 생선 가게를 두고 예까지 찾아오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렸지만 입맛은 있어서, 이렇게 구해 온 생선으로 요리한 엄마의 잔치 상에 나는 바짝 붙어 서서 쫄깃한 생선살을 오물거렸다. 그 기억이 아직도 남아, 진짜 생선을 먹으려면 어시장에 가야 한다는 믿음이 나는 강하다. 일전에 자갈치 시장의 좌판에 앉아 소주 한 잔 곁들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주인장이 서비스로 주신 찐 오징어만 봐도 내 믿음은 흔들릴 수가 없는 것이다.
산 오징어를 그대로 쪄서 두꺼운 막칼로 쓱쓱 썰어 내 주셨는데, 싱싱한 오징어 속에 가득 차 있던 내장이 찌는 동안의 열기에 스륵 녹아서 접시에 흥건히 흐르고 있었다. 프랑스의 거위 간 요리가 세계적인 진미라지만 갓 잡은 국산 오징어의 내장에 비할까!
오징어를 십 수 마리는 으깨어 넣은 듯 원초적인 향에 찐득한 질감의 내장이 멋진 소스처럼 오징어를 감싸주어 하나의 요리를 이루고 있었으니. 그 맛을 생각하면 마트에서 사는 생선의 폭이 더욱 좁아지게 된다.
마트 생선이 필요 할 때에는 차라리 마감 시간에 임박하여 들른다. 유통 기한이 짧은 식재료라서 마트 마감시간이 되면 썰어 둔 생선이 세일에 들어가서다. 어차피 양식 생선에, 게다가 미리 썰어 둔 횟감이지만 이삼십 퍼센트 싸게 사면 그리 억울하지 않다.
집에 가져 와서 손톱 만하게 막 썬 다음 초고추장이나 일본식 폰즈 소스를 곁들여 식전의 전채 메뉴로 곧잘 준비한다. 특히 간장에 다시 물을 섞고 식초나 레몬즙, 귤즙이나 유자즙으로 신맛을 낸 폰즈 소스는 향긋하게 새콤하여 본 식사 전에 입안을 개운하게 만들어 준다. 여기에 고소하게 사각거리는 새싹을 얹으면 아삭한 청량감이 신선하여 마감 세일에 건진 생선의 부족한 탄력을 보완해 줄 수 있겠다.
여름용 제품으로 나온 메밀 국수를 구입, 여름에는 차게 준비했던 국물을 따끈하게 데워서 그릇에 담고, 탱탱하게 삶은 메밀 면을 말아 곁들이면 점심 메뉴로 좋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가다랭이 포.
가다랭이라는 생선을 건조, 숙성 시켜서 나무 도막처럼 단단해 졌을 때에 대패로 밥 내듯이 얇게 포를 뜬 것을 말하는데, 된장국이나 간장 국물에 이것을 솔솔 뿌려 넣으면 감칠맛이 더해져 맛 좋은 국물이 된다. 가다랭이포는 몸에 좋은 단백질에다 발효까지 시켜 놔서 영양이 만점이다. 어시장의 선도는 따라잡지 못해도 이 정도의 메뉴면 입맛을 살릴 수 있을 듯.
◎ 도루묵 구이
알이 꽉 들어찬 도루묵에 전분 가루를 탁탁 묻혀서 철판에서 튀기듯 구워내면 팔팔한 생선회와는 또 다른 생선 맛을 볼 수 있다. 예전만 해도 흔한 생선이었던 도루묵은 이제 만만한 생선은 아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많은 양을 사가는 바람에 가격이 올랐단다. 담백한 맛이 깔끔한 이 생선은 그냥 석쇠에 굽거나, 양념해서 조리거나 찌개를 끓여도 맛이 좋다. 꾸덕하게 말려서 볶거나 하면 술 안주로도 그만. 유난히 굵고 단단한 알은 굽는 동안 밖으로 튀어 나와 톡톡 터지면서 겨울철 정감을 살린다.
이번 주말에는 앙칼진 공기를 헤쳐 가까운 어시장을 찾아보자. 제철을 맞은 생선 한 마리를 잡아 보글보글 매운탕을 그 자리에서 끓여 내어 온 가족이 밥 한 공기 씩 뚝딱! 이마에 땀이 송글 맺힐 것이다.
푸드 채널 ‘레드 쿡 다이어리’ 진행자 박재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