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유세장 전기 끊기’‘유령 야당 만들기’‘야당의 선거 전략 훔치기’
4일 치러진 카자흐스탄 대선 등 최근 중앙아시아 국가의 선거에서 ‘옛 소련식 정치 술수’가 민주화 바람을 차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91% 득표율로 3선 연임을 예약하고, 아제르바이잔의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이 지난달 총선에서 승리한 이면에는 러시아로부터 전수 받은 교묘한 여론 조작이 횡행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6일 보도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이번 대선 때 겉으로는 야당 창당을 허용하고 야당 후보의 TV 방송 출연을 보장 하는 등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는 모양을 취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은 인쇄 기계를 압수 당했고, 야당은 선거 유세를 위해 대형 체육관을 이용하려 해도 ‘여당이 1년 동안 예약해 놓았다’며 거절 당했다.
야당은 어렵게 유세장을 구해도 전기가 끊겨 낭패를 보기 일쑤였다. 여당은 같은 시각 최신식 체육관에서 인기 가수 초청 콘서트를 열어 야당 후보 유세의 김을 빼놓았다.
야당 창당의 자유를 보장했다면서 그 증거로 내세운 것이 자신의 딸을 앞세워 만든 ‘오탄(조국)당’이다. 심지어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야당이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을 본 떠 노란색을 상징색으로 쓰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먼저 노란색을 자신의 상징색으로 썼다.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전 세계 체스 챔피언에서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한 게리 파스카로프는 최근 군중 연설을 위해 지방을 찾으려다 항공사가 ‘활주로에 돌이 깔렸다’며 비행기 이륙을 미뤄 일정을 취소해야 했다.
뒤늦게 찾았을 때도 갑자기 전기가 끊기고 호텔 예약이 취소됐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또 모스크바 시장 선거를 앞두고 야권 표를 분산시키기 위해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는 여권 인사를 모아 ‘국가 모국당’을 만들었다.
AFP 통신은 “카자흐스탄이나 아제르바이잔 집권 세력은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 이웃 나라 집권자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더러운 술수’를 치밀하게 이용했다”고 분석했다.
AFP는 “러시아는 그루지야에서 시작한 민주화 바람이 카자흐스탄까지 이어질 경우 러시아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하며 이에 개입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러시아 정부의 여론 분석 책임자 그레브 파블로프스키는 선거를 앞두고 카자흐스탄 정권 실세 다리야를 만나 선거 전략을 전수했다.
미국 등 서방 국가도 중앙아시아 국가의 부정 선거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AFP는 “서방 국가의 이런 침묵은 엄청난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을 지닌 카자흐스탄과 사이가 틀어져서 좋을 것 없다는 계산” 때문이라며 “앞으로도 자원이 풍부한 나라에는 결코 혁명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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