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규(44) 감독이 ‘마침내’ 할리우드로 간다. ‘간다’ 고 한 지,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크루즈 등이 속해 있는 할리우드 메이저 에이전시인 CAA와 계약한 지 1년 6개월 만이다.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로 문을 두드린 때와 달리 ‘감독’ 으로서의 입성이다. 이름하여 ‘S프로젝트’. SF 영화이다. 벌써 여섯 번이나 시나리오를 고쳤고, 이 달 중순이면 러닝타임과 등급조정을 위한 마지막 손질이 끝난다.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공식발표 전까지 ‘비밀’ 로 해 달라는 그의 부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제목(구약성서 12소예언서에 나오는 인물)도 결정했다. 프로듀서는 SF 영화를 만들어 본 메이저영화사 사장이 맡는다. 두 달 전 영어로 된 6고(稿) 시나리오를 8명이 읽고는 모두 “하겠다” 고 덤벼들어 감독이 직접 골랐다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제작 방식(할리우드 메이저 주도형 제작이냐, 독자 제작 후 할리우드 배급이냐)과 캐스팅, 스태프 구성이다. 내년 1월 할리우드로 가 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7월부터 촬영을 들어가 2007년 여름, 늦어도 하반기에는 자신의 첫 SF 영화이자 할리우드 진출 1호 작품을 세계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S프로젝트’ 는 강제규의 오랜 숙원이었다. 1999년 ‘쉬리’ 를 끝내고 ‘다음 작품은 SF’ 라고 선언한 그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할리우드와의 작업을 염두에 두긴 했지만, 지금처럼 영어로 찍는 게 아니라 아시아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시나리오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때 ‘태극기 휘날리며’ 를 만나 ‘다음에 업그레이드하자’ 며 일단 접었다. 그렇게 웅크리고 있다 ‘태극기…’ 촬영 후반에야 새로운 길을 찾았고, ‘S프로젝트’ 로 탄생했다.
▲ 어떤 작품이길래
CAA와의 약속 때문에 줄거리를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단절과 소통의 문제, 사랑에 관한 영화” 라고 했다. 그는 미래라고 인간과 사랑의 문제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SF 영화하면 으레 외계인, 핵전쟁 같은 과잉상상을 떠올린다. 할리우드가 그렇게 만들었다. 이를 즐기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 현실적 공감대가 적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가상적 접근이 필요하다. 지금 어린아이가 노인이 됐을 때 어떤 현실적 문제에 부딪치게 되나. 그것이라면 SF 마니아가 아니라도 쉽게 빠져들고 공감할 것이다.”
이야기를 확장하면서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상상의 뿌리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調信)의 설화이다. 마치 현실 같은 꿈과 그 꿈이 남긴 아픔과 깨달음.
제목이 된 성서의 인물 역시 독특한 세계를 경험한다. 바로 그 꿈과 다른 세계의 경험이 강제규가 말하려는 현실적 가상일 것이다. “SF 영화에도 인간 성찰이 필요하다. 미래는 왜 존재하는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할리우드도 알지만 힘들기 때문에 못하고 있다. 있다면 ‘마이너리티 리포터’ 정도이다.”
결론은 ‘드라마’ 라고 했다. 드라마와 감성이야말로 할리우드 SF 영화의 한계인 동시에 강제규의 가장 큰 장점이자 미덕이다. 기발하고 새로운 발상보다는 대중적 공감대를 얻는 탄탄한 이야기야말로 특히 SF 영화에서는 인간 내면으로 들어가는 문이자 길이라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다. 상품성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나의 변별력이고 경쟁력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할리우드가 좋아하고 흥미로워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 왜 할리우드, SF물인가
“개인적으로는 소통확장의 욕심 때문이다. 민중, 민족보다 인류라는 개념이 친숙하다. 그래서 영화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소통하려는 욕망을 난 영화에서 찾는다. SF를 선택한 것도 한국 시장에서는 약하지 모르지만 세계적으로 안전하고 호소력이 큰 장르이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가 한때 유행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10년 뒤에 ‘옛날이 좋았지’ 라고 말한다면 서글프다. 영화는 치열한 산업화 경쟁의 극점에 있기 때문에 김치처럼 세계화를 해야 한다. 그러자면 중독시켜야 한다. 전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것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문화수용에는 단계가 있다.
우리 미덕이 상대 미덕으로 곧바로 관철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류도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 동일문화권에서 수 천년 동안 소통해 온 베이스가 만든 것이다. 할리우드가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단순한 소개를 넘어 삶의 일부가 되도록 다양한 노력과 시도를 해야 한다. 나의 작업은 그 다양함 중의 하나다.”
그는 “할리우드는 정직하다” 고 했다. 한국 영화의 가장 큰 적에게 이 무슨 극찬인가.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하나의 가치관으로 규정하면 악이 된다.
할리우드적이란 게 뭔가. 영화를 통해 대중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전세계와 소통하려는 것이다. 그 미덕을 내가 보여주고 싶은 영화에 활용하겠다. 이를 비틀어서 험한 길을 돌아서 가고 싶지 않다. 할리우드적 상황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성공하기 어렵다. 어디서든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나를 잃으면 모든 것 다 잃는다. 한국에서는 내 영화를 할리우드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할리우드 사람들은 내 시나리오를 보고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런 영화 만들어 달라’ 는 주문 생산자로 진출한 홍콩의 우위선(吳宇森) 감독과는 접근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강제규가 만들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혼자 어려우니 너(할리우드)의 자본과 기술을 부어 달라’ 는 식이다.
실제 1년 반 동안 막연히 기다리기에 불안한 CAA가 ‘몽키 킹’ ‘슬로우맨’ 등 13편의 시나리오를 보내왔지만 강제규는 모두 거절했다. “상황 다르기에 결과나 만족도도 다르다.
계속 할리우드에서 일할 생각은 아니다. 하고 싶은 영화가 SF이기 때문에 한다. 앞으로 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 더 생기겠지만, 그 결정도 나의 의지다.”
▲ 크기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쉬리’ 도, ‘태극기…’ 도 그랬다. “나에게 충실한, 작지만 심연을 들여보는 영화를 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그것으로 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싶고.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에 더 고민한다. 한국 영화에서 나의 사명감과 존재 가치는 도전과 확장이다.
대부분의 지금 한국 감독들은 영화 암흑기를 살아보지 않아 냉대와 무기력의 비참함을 모른다. 영화는 공존이 어려운 매체다. 끝없는 세계화로 1등에 오르지 못하면 설 자리가 없다.”
할리우드 도전을 위해 그는 영화사 MK픽처스의 모든 자리와 일을 버리고 ‘감독’ 만을 택했다. “내 작품만 하는 게 좋다. 그러기에도 할 일이 많다.” 그럴 수밖에. 늘 그의 눈과 마음은 넓은 곳을 향해 있으니.
이대현 대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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