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는 우연한 사건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87년 봄 유신헌법을 유지하려는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직선제 개헌 투쟁과정에서 터져 나온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다. 고문치사도 문제지만 특히 정부의 은폐 의혹이 제기되면서 국민적 분노가 폭발해 6월 항쟁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온 “책상을 ‘탁’ 하고 치자 심장발작을 일으켜 ‘억’하고 죽었다”는 코미디 같은 경찰의 발표는 두고두고 회자할 은폐공작의 백미로 길이 기록될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나 있을 것 같은 이 같은 비극적인 코미디가 참여정부를 자칭하는 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얼마 전 노무현 정부가 한나라당과 합작하여 통과시킨 쌀 시장 개방 국회 비준안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시위과정에서 전용철이라는 한 농민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생겨났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경찰은 시위 농민들의 머리를 방패로 무자비하게 내리찍는 등 과잉 진압작전을 폈고 그 과정에서 방패와 진압봉으로 머리 등을 맞은 전씨는 “방패로 맞았는데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했고 얼마 뒤 쓰러져 실려 가야 했다는 것이다.
●쌀개방 반대시위 농민 사망
그러나 경찰은 전씨가 집회 뒤 귀가하다가 집 앞에서 넘어져 쓰러진 것이라고 은폐를 시도했지만 전씨가 시위현장에서 실려 나오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스타일을 구기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경찰청장이 직접 나서 전씨가 집 앞이 아니라 시위현장에서 쓰러졌지만 간경화 말기로 술 먹고 구토하고 쓰러졌을 개연성이 높다는 한심한 해명을 했다. 이번엔 구타장면을 목격한 증인들이 나타나면서 또다시 신뢰성에 타격을 받고 말았다.
얼마 전 박종철을 고문해서 죽게 했던 문제의 장소에 인권센터를 만드는 등 인권경찰로의 변신을 시도한 것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만 것이다. 아니 단순한 경찰의 위신을 넘어서 천주교 등 4대 종단 인권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고 노무현 정부의 정체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사태로 발전하고 말았다.
물론 이번 사건과 은폐는 87년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이 87년 6월 항쟁과 같은 국민적 저항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박종철 사건과 상당한 유사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노무현 정부의 정체성에 또 하나의 오점을 기록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이 결코 우연하게 생겨난 우발적 사고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추진해온 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은 사회적 양극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존권 수호 차원에서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 농민, 그리고 서민들을 억누르기 위해 국가를 공권력에 의존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찰국가’로 변질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이 같은 일이 여러 번 발생했다. 해외매각에 반대하는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진압과정에서 보여준 무자비한 폭력, 그리고 80년 광주를 연상하게 했던 롯데호텔 노조 파업 진압작전이 대표적인 예이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정부 판 광주사태’라고 할 수 있는 부안사태로부터 노태우 정부 시절 신 공안정국이 전개됐던 91년 이후 13년 만에 가장 많은 사람이 분신 등으로 목숨을 끊었던 지난해 노동자들의 연쇄사망 정국 등 그 예는 많다.
●盧정부 정체성에 오점 추가
전씨의 죽음으로 인권단체들이 노무현 정부의 정체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표시하고 있을 때 언론들은 노 대통령이 자신을 행복한 대통령이라고 자평했다고 전했다. 그것도 독선적 언행으로 문제가 많은 이해찬 총리와 천생연분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경찰국가에 의한 한 농민의 죽음과 행복한 대통령,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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