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42) 록 그룹 '킹 크림슨'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42) 록 그룹 '킹 크림슨'

입력
2005.12.06 00:00
0 0

새삼스레 무슨 철학적이거나 물리학적인 성찰을 해보자는건아니다. 그렇지만킹크림슨 의사운드를 들으면, 단순히 감정적 밀도나 감성이 극대화되는 것을 초과하여, 모종의 인식론적인 파열이 발생한다. 1969년첫앨범‘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을 발표한 이래로 이른바 프로그레시브 록의 제왕으로 군림해 온 킹 크림슨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소리의 극(極)을 좇아왔다. 데뷔 앨범에서부터 그들은 프리 재즈의 연주 양식과 고전음악에서 원용한 악곡 편성을 바탕으로 그들 특유의 전위적인 사운드를 창조해냈다. 록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곡으로 손꼽히는‘Epitaph’가수록된그앨범은 딱히 장르를 규정지을 수 없는 음악 스타일들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정교하게 혼성 교배되어 있다. 때문에 그 앨범은 30여 년을 훌쩍 넘긴 지금 들어도 여전히 새롭고 충격적이다. 완성도및호오(好惡)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런 새로움과 신선한 충격은킹크림슨의 모든 앨범에 해당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듯싶다.킹 크림슨은 30년 동안 일방향으로 고정된 음계를 갖지 않은 채, 모든 가능한 음들의 총체적인 종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코드의 파괴자인 동시에, 파괴 자체가 코드화되는 순간, 부지불식 예상치 못한 운지법으로 전환하여 모든 음계로부터 홀연히 이탈한다. 이글은 그란스러운듯 명징한 킹크림슨의 사운드에 이끌려 분방하게 쏟아놓는 감각의 자동기술로 흐를 것이다.소리의 공명이 극대화될때, 킹크림슨의 사운드는 돌연 침묵을 닮아간다. 그침묵은 소리가 없는 게 아니라, 소리의 극단에서 불현듯 마주치게 되는 의식의 진공 상태에서 발생한다. 암흑 속에 그어진 빛의 금들을 연상케 하는그것은 대리석이나 철판 등에 고밀도로 세공한 조각품을 닮았다. 그것은 사물들 간의거리를 수시로 늘이거나 줄인다. 그럼으로써 침묵과 소란이 혼재된 특출한 사운드의 구축물 이빛의 구조물처럼 드러난다. 킹크림슨의 음악이 쉬이 몰입하기 어려운듯 보이면서도 한번 빠져들면 총천연색의 미로를 마주케 하는건 바로 그 까닭이다. 그러나 애당초 음악 속 에미로란 존재하지 않는다. 소리는 연상의 촉매일 뿐, 그 자체로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기의 움직임, 즉 바람과 닮았다. 소리는 시간의 한 정점을 장악해 공간의 내부적인 얼개를 변화시킬뿐, 그자신의 공간을 가지지 않는다. 킹크림슨은 그러한 소리의 속성을 한없이 미분하고 비틀어 늘 마주하던 공간이 몇개의 다른 차원을 함유하거나 가리고 있다는 인식을 이끌어낸다.소리는 차이의 체계다. 소리는 나타나면서 사라진다. 또는 일시적인 나타남과 사라짐의 연속에 의해 소리의 구조물이 침묵의 뻘늪에서 솟아오른다. 구조물이라고는 했지만, 그건 어차피 소리를 매개로 청자의 몸속에 지어진,그러나 지어지는 순간 다른 형태로 변하거나없어지는 상상의 구축물일 뿐이다. 상상이라는점에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외연이다. 앞에서 말한‘빛의 구축물’(킹 크림슨이2000년 발표한 앨범 타이틀은‘Construkctionof Light’이다. ‘Construkction’ 가운데있는‘k’는 의도적 오기이다)이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피드백된다. 빛은‘부재’ 또는‘침묵’이라는 암흑의 형상에 동선을 부여한다. 또는 그자체로 암흑을 시각적^물리적인 사물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그것의 출몰은 지극히 한시적이다. 눈을 감고 볼륨을 높일수록 그것은 더 커지지만, 페이드 아웃되는 프레이즈의 미미한 파동과 함께 뜨여진 눈앞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현실의 공간에 그 소리의 그림자들이 덧씌운 비가 시적인 잔영은 끝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그대로인 듯 보이는 현실의 공간이 무언가, 어떻게든 변해 있다. 음악이 꿰뚫고 나간 내 몸 또한, 이전의 그 몸이 아니다. 나는 어딘가 아프거나 변형된 자신을 느낀다. 나는 나로부터 빠져나온,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던 어떤 타자와 마주친다. 이 3차원의 세계 속에 무언가 다른 차원의 공간을 통과해 나온 잔해가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부유하는 것이다. 음악이 찌르고 간 마음의 어떤 숨은 결들이 그 위에 얹힐 때, 스피커 속에 갇혀있던 음악은 비로소 세계 속에 저만의 특유한 준거틀을 확보하며 현실의 공간으로 전환한다. 그것은 음악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또는 우리가 음악을 듣고 발견해야 할, 기지(旣知) 속의 미지(未知)이다. 출발은 얼마나 단순한가. 튕겨지는 기타와 튕기는손(또는 피크). 세상의 모든 기초 얼개가 그렇듯, 전제는, 그것이 너무도 당연해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명명백백하다. 그명명백백한 사실 속으로 뛰어들어 뻔해 보이는사물과 사물 사이의‘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건 어쩌면 시인이나 혁명가의 몫이다. ‘다른 세계’란 곧, 세계가 은폐하고 있던 어떤 진실과도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30년 동안 킹 크림슨을 이끌어 오면서매앨범마다늘새로운사운드를 창조해내는 기타리스트 로버트 프립은 시인이거나 혁명가이다. 이런 단순 대입, 과도한 찬미의 뉘앙스를 용서하시라. 나는 단지,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감상을 부추겨 그 감상의 대상에 대해 말할 뿐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대상에 이입된 감상자의 발언은 단순한‘소견’이상으로 오버되기 마련이다. 틀어놓은 음악은 사방 벽을 때리며 달팽이관을 타고 돌아 대뇌피질을 조이거나 펼치면서 소멸하지만, 음악이 그야말로 온몸에 넘쳐 철퍼덕거릴 때, 나는 내 몸밖으로 빠져 나온다. 일종의 패닉이다. 그러나 향유할 만한,그리고 만끽하고 창조적으로 변형시킬만한,아주 기꺼운 공황이다. 킹 크림슨은, 감히 단언하건대, 음악이 주는 이런 효과를 주지하고 그것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작업을 초지일관 지속하고 있다. 사물과 사물의 맞부딪침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현상의 극단에 위치한 세계의 배면, 그리고 그 공허한 공명속에 떠도는 소리를 분절하고 재단하여 다른 공간을 짜는 것. 킹 크림슨은, 특히나 기타리스트 로버트 프립은 세상의 모든 벌어진 틈을 메우는 거미의 본능과도 흡사한 광기를 한 세대를 넘기고 세기가 바뀔 때까지 잃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21세기의 정신 분열증

사나이’라는 그의 별명은 단순한 트레이드마크가 아닌, 그의 음악적 본질을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다(킹 크림슨의 데뷔 앨범에‘21st Century Schizoid Man’이라는 노래가 있다). 세상은 이런 몇몇 기예나 지혜의 극에 달한 미치광이들에 의해 재편되거나, 무너짐이 예고된다.

세계의 변이는, 마치 자본주의 시스템이 그 자체에 내포한 치명적인 맹점에 의해 유지되고 관리되듯이, 기존재하는 사물들의 법칙들 속에 내재해 있다. 그러나 그 내재성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다가 돌연 기괴한 형태

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외계의 사물처럼 취급된다. 암흑은 모든 사물의 근원이면서, 세계의 질서를 먹어치우는 외계의 괴물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단 한 줄기의 실재적인 빛도 없이 오로지 소리의 파동이라는단하나의 질료로형성된 거대한‘빛의 구축물’은 그렇듯, 침묵의 외연적 형태인 동시에, 암흑의 소리들로 교직된 어느 무한공간을 닮아 있다. 그것은 곧 한 음악가 집단이 감각적으로 체험한 우주의 형태를 잠정적으로 예시한다. 어디로든 뻗쳐 있으나, 어느 쪽으로도 방향을 잡을 수 없는 침묵과 암흑의 격정적인 파동. 킹크림슨은 어쩌면 음악으로 바벨탑을 쌓으려는 자들인지도 모른다. 무너질 줄 알면서, 그 무너짐의 나락을 끝없이 예각화시키는 분열의 피드백이 이토록 첨예한 형태로 암흑 속에 불꽃으로 번진다.

시인 nietz4@naver.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