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가정을 해 보자. ‘PD수첩’ 사건이 SBS에서 일어났다면? 이보다 앞서 압사 사고의 비극을 부른 경북 상주 공연을 SBS가 기획했다면?
아마 지금 MBC보다 열 배, 스무 배는 더 당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못마땅한 상업방송, 정치적으로는 개혁적이지 못하고 선정성과 폭력성 말초적 오락으로 시청률이나 높이려는 방송이라며 지난해 재허가를 앞두고 온갖 도덕성을 동원해 비난의 화살을 맹렬히 쏘아댔던 MBC와 일부 언론은 길길이 날뛸 것이다.
시민단체도 “더 이상 SBS를 이대로 둘 수 없다” 며 지금보다 훨씬 강한 비난의 성명서를 연일 내놓았을 것이다.
혼자만의 엉뚱한 가정이 아니다. MBC ‘PD수첩’ 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2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SBS 콤파스미팅에 참석한 90여명의 팀장들도 이런 가정을 했다. 그리고는 “생각만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아마 SBS는 지금쯤 쑥대밭이 됐거나, 방송국 문을 닫아야 했을 것이다”, “이게 이름 뿐인 공영과 민영의 차이인가” 라고 말했다
콤파스미팅이란 SBS가 자기검증과 미래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1년에 두 번 마련하는 세미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번에는 아예 주제를 ‘외부에서 바라본 SBS’ 로 정했다. 각 분야의 인사를 초청해 ‘비판’ 을 듣고 그것을 겸허히 수용해 거듭 태어나겠다는 의지이다. SBS는 스스로 지금을 ‘위기’로 보고 있다.
물론 그 위기를 알게 해준 데는 MBC가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마치 경쟁상대를 쓰러뜨리고야 말겠다는 기세로, ‘공영’이란 무기를 휘두르며 MBC는 SBS의 출생부터 공격했다. 어설픈 SBS의 대응과 변명은 상대의 기세만 높이는 꼴이 됐다.
SBS는 어쩔 줄 몰라 했다. 15년이 지나도록 지상파 민영 TV로서의 역할과 새로운 길을 개척해 당당한 자기 정체성을 만들기보다는 그저 눈치 보며 ‘기쁨 주고 사랑 받는 방송’ 만을 외쳐온 결과였다.
분명히 달라야 함에도 시청자들이, 방송위원회가, 시민단체가 SBS를 KBS MBC와 같은 잣대로 지금껏 보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도 SBS의 자업자득이다. SBS는 호된 상처와 대가를 치르고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그 교훈을 발판으로 가장 중요한 정체성에서부터 조직, 운영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SBS를, 아니 자신들과 맞지 않는 대상이면 무조건 ‘적’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던 MBC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자신들이 주장하던 도덕성은 각종 비리연루와 비열한 취재방법으로 바닥에 떨어졌고,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공영’은 정치적 의도와 폭로주의로 ‘사욕’이 돼 버렸다.
뉴스데스크 시청률이 SBS 8시뉴스에도 뒤지고, 시청률 20위 안에 한 프로그램도 끼지 못할 정도로 국민이 외면하는데도 누구처럼 ‘우리 방송은 21세기를 살고 있는데, 시청자들은 군사독재시절에 살고 있다’ 는 식의 오만을 부릴 텐가. 자기검증과 반성을 잃어버린 MBC에게 PD수첩 사건이 정말 마지막 교훈이 되기를.
/이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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