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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황우석교수가 말하지 않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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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황우석교수가 말하지 않은 것들

입력
2005.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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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교수 연구 문제가 진위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제기된 연구 과정의 윤리 논란은 완전히 해결된 것 같지 않다. 진위 논란과는 별도로 윤리 문제에 대한 성찰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황우석 교수의 윤리 문제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이 전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실은 ‘순수한 사실’로 보다는 ‘해석된 사실’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같은 사실이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인권이라는 글로벌 스탠더드도 누가 어떤 의도로 주장하느냐에 따라 각각 다르게 적용된다. 또 동일한 글로벌 스탠더드라도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달라지며 동서양의 차이도 존재한다.

동서양의 윤리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서양에서는 일단 모든 사람이 무조건 따라야 할 절대적 기준을 제시하고, 거기에 시시비비가 가려지는 기계론적 태도를 갖고 있다. 바로 윤리제일주의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그런 기준을 인정하되 그 기준을 실천하는 과정에서는 ‘인간적 요소’를 참작한다.

우리가 흔히 ‘인간의 모습을 한 과학’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황 교수는 연구원의 사생활 보호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서양의 잣대로 보면 이건 있을 수 없지만, 그것이 바로 동양적인 측면이다.

윤리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윤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공자가 “도(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를 넓힌다”고 선언하고, 예수가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존재한다”고 선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제럴드 섀튼 교수는 이런 동서양의 차이점을 알고 있었는가? 아마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동서양의 차이점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으면서도 황 교수와의 결별을 선언했다면, 우리는 그의 동기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단지 동양의 인간적 측면을 무조건적 원칙에 대한 일탈로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런 동서양의 차이점을 잘 알고 있는 황 교수는 왜 무조건 서양의 잣대로서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어겼다고 고백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황 교수는 서양과 동양의 기준을 동시에 충족시키려는 완벽주의자인 것 같다. 그러나 황 교수는 윤리적 기준에도―그 실천과정에 있어서는―동서양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미리 숙지하고 있어야 앞으로 발생할 유사한 실수들을 더욱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황 교수가 동양적 특수성을 주장하려면 자연히 그에게 기꺼이 협력했다가 등을 돌린 섀튼 교수 등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에 대한 지나친 자비심을 버려야 한다.

이제 우리는 황 교수가 말하지 않은 부분, 말할 수 없었던 동양적 부분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서양적 잣대로 제시된 서양의 입장만 무조건 받아들이고, 동양적 시각에 대하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서양인들이 서양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장하고 동양인들이 동양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장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엄연히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더구나 서양인들이 그들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요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계속 서양의 잣대만 따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용감한 일이기는 하지만 극히 무모한 일이 될 수도 있다.

황필호 강남대 신학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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