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에서 숱한 유령과 악당을 만난다. 그러나 결국 우리 자신과 만난다”
율리시즈(Ulysses)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말이다. 인간과 삶이 그만큼 복합적이고, 세상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뜻일 것이다. 율리시즈를 20세기 최고의 영어소설로 꼽는 것도 이 소설이 제목과 구성을 본 딴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Odyssey)가 그렇듯이 인간과 세상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탁월한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뒤틀린 모습 드러나
황우석 교수와 MBC PD수첩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면서 제임스 조이스의 말이 먼저 떠올랐다. 비윤리적 난자 채취의혹에서 배아줄기세포 조작의혹으로 치달은 사회적 논란과 파문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친다고 생각했다.
과학과 윤리, 진실과 국익을 가르는 경계를 선명하게 그어 놓고 치열하게 다퉜지만 정작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그런 고상한 가치보다 우리 자신의 뒤틀린 모습과 편향된 의식이다.
황 교수는 일과 성취에 매달려 윤리문제에 소홀했다고 자책했다. 객관적 국제언론도 야망과 성공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탓으로 풀이했다. 여기까지는 대범하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 전체가 성취동기에 치우쳐 과학과 윤리의 충돌을 진정으로 고민하지 않는다는 지적은 통렬하다.
이를테면 스위스의 권위지 노이에 취리허 차이퉁은 황 교수의 윤리위반이 한국인들의 존경심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인터넷 지지 댓글과 촛불시위 및 난자기증 캠페인 등의 열정적 애국심의 표출로 이어진 것에 주목했다.
사회와 정부가 함께 윤리논란보다 줄기세포 연구의 선두자리에 집착하는 모습이 황 교수 문제를 한국사회의 정체성 차원으로 넓혀 보게 한다는 말로 들렸다.
이런 국제언론의 시각은 황 교수 옹호 여론이 내세운 국익론이 실제와는 상관없는 자기 기만일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동서양의 윤리관 차이까지 거론하지만, 현실의 국제경쟁에서 선두를 노린다면서 그 경쟁의 도덕률을 어긴 행위나 명분을 옹호하는 것은 스스로 얻는 위안과는 무관한 자해행위다.
이런 사리를 깨닫는다면 황 교수의 영웅적 업적에 감격한 나머지 윤리측면을 살피는 데 소홀했던 것을 열심히 반성하는 것이 사회와 정부가 할 일이다. 그 것이 황 교수와 한국 생명과학의 장래를 돌보는 지혜라고 믿는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PD수첩의 범죄적 과오보다 황 교수의 윤리 위반을 장황하게 이야기한 것에 분개할 것이다. 그러나 황 교수의 과학 연구활동과 PD수첩의 유사 언론행위를 대등하게 다루는 것은 애초 잘못이라고 본다. PD수첩이 줄기세포 조작의혹을 취재한 방식과 보도행태는 언론의 영역과 본분을 크게 벗어났다.
논란의 결과를 좇아 말하는 것이 아니다. PD수첩이 과학적 연구결과를 스스로 검증했노라고 밝혔을 때 이미 언론을 포함한 사회는 그 정당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했어야 한다.
그걸 미룬 채 엉뚱하게 진실과 국익 논란을 하거나, 선정적 관심과 논란의 향방을 가늠하는 기회주의에 이끌린 것이 혼란을 부추겼다. 이런 혼란이 사회의 노력보다 사물의 이치에 따라 정리된 마당에는 정상적 논의로 되돌아가는 것이 뒤늦게나마 순리를 좇는 길이다.
●정상적 논의 자세가 시급한 과제
물론 이른바 PD 저널리즘 또는 탐사보도의 일탈과 해악은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그 반성은 PD수첩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 PD수첩이 그 동안 언론으로서 치명적 병폐를 드러내면서도 이를 고치지 않은 데는 성공적 탐사보도 실적을 보인 것과 함께 사회가 선정성에 이끌려 일탈을 묵과한 탓이 크다.
특히 정치가 이를 이용하고, 방송이 스스로 정치적 고려에 유혹된 것도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번 논란에서 네티즌과 언론과 대통령에 이르는 사회가 저마다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성찰해야 한다. 우리가 만난 유령과 악당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십상이다.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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