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서울 도심을 하얗게 덮은 4일 이른 아침. 영하 5.9로 떨어진 추위가 살을 에었다. 이날 오전 6시10분께 서울 종로구 창신2동 달동네에서 이발소를 하는 이모(35)씨는 빙판길을 걸어 2평짜리 단칸방을 찾았다. 3년 동안 암을 앓고 있는 이웃 송모(61) 할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했다.
살 비빌 피붙이 하나 없이 모진 병마와 싸우며 홀로 사는 송 할아버지는 이씨의 단골고객이자 말벗이었다. 슈퍼마켓에서 마주치면 살갑게 인사를 주고 받던 그가 며칠동안 통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은 켜져 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이상한 냄새도 났다. 짐짓 불안한 생각이 든 이씨가 방으로 바로 연결되는 미닫이문을 열자 침대 매트리스 옆에 송 할아버지가 엎드려 숨져 있었다. 이씨는 “매트리스 주위엔 송 할아버지가 사망하기 직전 토한 듯 까맣게 응고된 피가 쏟아져 있었고, 마지막 고통이 괴로워 뒤척인 듯 베개와 이불도 흐트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가 본 광경은 하얀 눈이 쌓인 창 너머 세계와는 너무 달랐다. 이씨는 경찰에 변사신고를 했다.
기자가 이씨와 함께 5일 찾은 송 할아버지의 방안은 아직 누가 살고 있는 것처럼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이는 단칸방 벽엔 깔끔한 주인의 성격을 과시라도 하듯 옷걸이와 주방기구가 각자 위치를 잡고 있었다.
숨진 송 할아버지는 2년2개월 전 달동네로 혈혈단신 이사를 왔다.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단칸방이었다. 젊은 시절 신발 장사를 하며 서울 불광동 등 이곳저곳 떠돌았지만 10년 전 아내와 헤어진 뒤엔 사업마저 실패했다. 2남1녀가 있다는 사실은 그가 숨진 뒤에야 알려졌다.
송 할아버지는 3년 전부터 암을 앓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의지해 근근이 생활비와 약값을 마련했지만 1년 전부턴 그마저도 끊겼다. 주민들은 할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를 기초생활수급대상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줬다. 하지만 몸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1년 전 ‘1종 수급대상자’로 무료수술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불치’ 판정을 받아 접어야 했다.
그는 부근 이화여대 동대문병원에서 간단한 치료와 약을 받는 것만으로 밤마다 심한 고통을 견디며 죽음과 마주해야 했다. 친한 몇몇 이웃 외엔 자신의 투병 사실도 숨겼다.
그 와중에도 그는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동사무소에서 매달 받는 34만원으로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은 10여만원에 불과했다. 점심 값 등 사소한 비용은 근처 신발 공장에서 일을 도와주면서 벌어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경찰은 “사체의 부패 상태와 몸에 외상이 없는 점 등으로 미뤄 송 할아버지가 지병 등으로 3, 4일 전에 숨진 것으로 보인다”며 “자녀들과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고 살았고 다른 친ㆍ인척도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시신은 서울 답십리동 한 병원의 시체 안치실에서 쓸쓸히 가족을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 6일 그의 자녀들이 병원을 찾는다고 한다.
신기해 기자 shink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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