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공부는 크게는 두 갈래 길을 걸어왔다. 하나는 우리 민속과 신화와 전통에 대한 공부이고, 다른 하나는 박람다기한 인문학적 지식을 토대로 한 문화비평이었다.
내가 민속과 신화와 전통을 사랑하게 한 데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영향이 지대했다. 나는 우리 아버지의 2남1녀 가운데 맏이였다. 아버지도 맏이여서 우리집에는 할머니가 계셨다.
그런데 맏집의 맏이는 어머니의 자식이 되지 않고 할머니의 자식이 된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 할머니 방에서 살았다. 잠도 물론 거기서 잤다.
내가 잠들기까지 할머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여우가 쫓아와서 파란 물병을 던졌더니 푸른 강이 생겨나고, 붉은 물병을 던졌더니 불길이 솟아나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잠이 들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수많은 토끼와 호랑이 이야기를 할머니한테 들었다.
어머니는 또다른 작가였다. 비록 초등학교도 못나왔지만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고향이자 할머니의 고향이자 나의 고향인 고성에는 여성들을 위한 '언문제문'의 전통이 있었다. 딸들이 제사 때가 되어 친정엘 가면 오라비들이 한문으로 제문을 읊은 다음에 딸들이 한글로 제문을 지어 바치는 전통이었다.
돌아가신 이의 한평생을 묘사하고 시집가느라 고인을 모시고 싶으면서도 못 모신 안타까움이나 서러움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을 울리곤 하던 어머니였다. 나는 그런 어머니와 할머니를 보면서, 가장 현대적인 페미니즘보다 더 앞선 여성 중심의 신앙과 문학의 전통을 어려서부터 몸으로 체득했다.
또다른 내 학문은 한국문학이 아니라 서양문학에서 발원한 인문학 공부였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50년대에는 한국문학을 가르칠 체계 자체가 잡혀있지 않았다. 담당 교수도 "네가 알아서 공부하라"고 할 정도였다.
나는 그 때 한창 유행인 실존주의 철학과 독문학에 빠져들었다.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때 그런 책들을 만난 덕분이었다.
당시 충무로에는 소피아라는 아주 작은 서점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외국책을 팔았다. 거기서 나는 가브리엘 마르셀과 막스 피카르트, 엠마누엘 레비나스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을 만났다.
인간과는 동떨어진 거룩한 신앙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개개인의 특수한 삶이 어떻게 신과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느냐를 고민한 그들의 철학은 전쟁을 겪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고민하던 내용과 맞아 떨어졌다. 나는 그들을 읽으면서 학문이, 공부가 인간의 삶에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얼추 알아갔다.
전쟁 때문에 워낙 많은 죽음을 목격했던지라 문학을 해도 죽음을 다룬 문학이 마음에 와닿았다. 소피아에서 내가 만난 또 다른 사람은 릴케였다. 릴케는 죽음과 질병을 노래한 시인이다.
가끔 나는 학생들에게 그를 소개할 때 '쓰레기 작가' '재활용 작가'라고 부르곤 했다. 죽음이나 질병처럼 남들이 못 쓴다고 버린 것을 주워서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시인이라는 뜻에서 말이다.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나 '오르페에게 바치는 소네트' 같은 것을 읽으면서 나는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듯한 죽음과 질병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방학이 오면 절을 찾아다니곤 했는데 어느 한 해는 오로지 릴케와 독일어사전만을 들고 가서 그를 외우다시피 읽으면서 나는 문학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갔다.
그랬다. 생각해보면 우리 또래에게는 학문 자체가 길거리에서 줍고 쓰레기통에서 찾은 것이었다. 어떤 책을 우연히 만나느냐에 따라 학문의 진로가 정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려서부터 병약했기에 나는 책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었고 책을 읽다 지쳐 암송하던 버릇이 생겼는데 그게 나중에 서양의 인문학을 공부하는데 좋은 바탕이 되었다.
'약골'은 초등학교 시절 내 별명이었다. 정말 병치레를 많이 했다. 약을 밥보다 더 많이 먹고 자랐다. 그러자니 자주 앓아 누웠다. 라디오며 축음기가 귀물 중의 귀물이던 시절이다.
책읽기, 글읽기가 유일한 심심풀이였다. 그것만이 병석에서 누리는 시간 보내기의 전부였다. 물론 어릴 적이라서 동화나 위인전 그리고 어린이소설 읽기가 주류였다. 그게 나 혼자 하는 독습(獨習) 글공부의 시작이었다.
책을 읽다가 열에 지치거나 아니면 피곤해지면 나는 곧잘 머리 속으로 이것 저것 궁리를 하곤 했다. 드문드문 소설이나 동화의 대목을 외는 한편으로는 그걸 실마리 삼아서 내 나름으로 줄거리를 엮고 장면을 그려내곤 했다.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이내 한 편의 동화가 창작되는가 하면 며칠 몇 날 걸려서는 한 권의 소설이 엮어지곤 했다.
이 버릇은 '글읽기 공부'를 강화하는 다른 한편으로 내게 '글짓기 공부'를 하게 했다. 글공부는 남의 글을 읽어서 제 글 짓는 데 다다라서야 비로소 제대로 제 구실을 다하게 된다는 믿음이 차츰 커갔다.
이 경우, 상상과 공상이 큰 사명을 맡아 주었다. 그건 복습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지식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나만의 자습(自習)이라는 몫이 더 컸다.
읽다가 덮어 둔 책의 내용을 빌미 삼아서 내 멋대로 혼자 생각에 잠기는 일, 그것 또한 내게는 여간 소중한 그리고 재미난 '글공부'가 아니었다.
어린 나의 연수이자 연찬이고 연구였을 이 습관은 대학 시절, 릴케와 횔더린을 읽을 때도 똑같이 이어졌다. 암송하도록 읽고 거기서 다시 나의 상상이 보태어졌다. 내가 나중에 문학 전공의 교직자가 될 수 있게 인도한 길라잡이가 바로 거기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인문학에서 공상이나 상상은 바로 구상이고 연구다. 아니 사고나 사색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릴케를 읽고도 상상이 덧붙여지고서야 비로소 나의 릴케가 태어난다.
가브리엘 마르셀, 막스 피카르트, 레비나스도 마찬가지이다. 어찌된 일인지 최근 들어서는 암송이라는 것을 마치 자기의 사고과정은 없이 남의 지식을 입으로만 외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경시하는 풍조인데, 실은 동서양의 인문학은 모두 이 암송에서 출발한다.
동양에서는 공자와 맹자를 암송하게 했고 이 성현들의 지식이 암송을 통해 내 것으로 익혀진 후 나의 상상과 철학이 보태어져서 새로운 학문이 탄생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그리스 로마의 고전문학을 암송하듯 반복해 읽는 것이 인문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교양과 인문학 공부에서는 암기며 암송이 바로 읽기 그 자체이다. 암기하지 않고 읽는 것은 밥 안 먹고 끼니 넘기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사랑 없이 젊음을 겪는 것이 차라리 암송 없는 글 읽기보다는 덜 허무하다.
줄거리 전체는 물론이고 재미난 대목대목마다 암기하는 것이 곧 내게는 글공부였다. 그 버릇은 두고 두고 내게 '학습'으로 또는 '학업'으로서 머물러 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교수로서도 연찬이나 연구를 말할 때도 이 점은 추호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달라질 수가 없다.
그 '글공부'의 버릇 때문에 내가 가르친 대학의 학생들은 남다른 부담을 안아야 했다. 무슨 과목이든 시험답안지 앞에 미리 지정된 영역이나 분야의 글을 되도록 많이 또 길게 암기해서 옮겨 적고서는 비로소 주어진 문제 풀이를 하게 강요당하곤 했다.
그건 대개가 시(詩)이긴 해도 말이다. '달달달 외운다'고들 하는데 나는 병석에서 달달달에 덜덜덜까지 겸해서 외어댔다. 그러면 어느 새엔가 나는 김기림이 되어 있었고 횔더린이 되어 있었다.
학문의 깊이는 우선 폭이 넓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땅을 깊이 파자면 표면부터 드넓게 파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독일 작가부터 프랑스 철학자까지 섭렵한 것은 내가 살아온 시대의 산물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넓게 땅을 파기 시작한 셈이니 잘된 일이다. 그 후로도 나는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 전공 책 읽기가 어째 사무를 보는 것 같고 업무 수행 같아서 딱딱하게 느껴질 적마다 전공인 한국문학과 민속이 아닌 분야의 글공부에 열을 올렸다.
일반 교양을 비롯해서 철학이며 역사 그리고 외국 문학 읽기에 상당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런 공부는 끼니가 아닌 군것질 같은 재미와, 출근길 아닌 산책 같은 신선함과, 정해진 길을 가다가 드넓은 광야나 찬연한 꽃밭을 돌아치는 것 같은 환희를 맛보게 해준다.
그래서 나의 대학 수업은 '잡학 강의'가 되곤 했지만 덕분에 지금 이 나이에 '디지털 내러티브'를 강의할만큼 온갖 것들이 내 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는 것 아닐까.
■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는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는 한국 설화와 샤머니즘, 전통 놀이와 구비문학에서 전통 정신의 뿌리를 찾으려는 작업에 앞장선 국문학자이다.
1932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나왔다. 충남대 교수를 거쳐 63년부터 91년까지 서강대 교수로 재직했다.
한창 잘 나가던 학자로서 서울 생활을 떨쳐버리고 고향인 고성으로 이주, 모든 것이 서울로 집중됨으로써 갈수록 피폐해지는 농촌을 살리겠다는 철학을 실천해서 화제를 모았다.
92년부터 고성에서 펜션을 운영하면서 지방에서 가르치는 일을 병행해왔다. 93년부터 2002년까지 인제대 교수를 지냈으며 계명대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요즘은 부산의 부경대에서 '디지털 내러티브'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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