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국가정보원의 내년 예산안이 증액된 것을 놓고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는 보도를 읽었다. 예산이 대폭 증액된 곳이 하필 해체대상으로 지목 받고 있는 국내 담당 부서이고 보면 일반 국민들은 어리둥절해진다.
임동원 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이 구속되고, 이수일 전 차장이 검찰 조사기간 중 자살한 소동이 모두 1,800명을 상대로 불법도청을 자행한 국내정보 수집 담당부서에서 비롯된 일들이기 때문이다.
6ㆍ29선언이 나온 1987년 가을 정치규제가 풀리고 정당활동이 활발해지던 때의 일이다. 새로 생긴 정당의 발기인 대회를 취재한 후 보도자료를 들고 회의장을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기자시죠" 라며 다가왔다. 그는 상당히 다급한 모습으로 자신이 안기부직원이며 새 정당을 담당한다고 밝혔다.
●YS, DJ때도 정권의 사유물
안기부 직원이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을 유발하던 때였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접근한 사유는 시간이 늦어 발표자료를 챙기지 못했다며 내가 가진 유인물을 베끼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다 공표되어 돌아다니는 자료를 입수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두 시간만 기다리면 석간신문에 다 나올 텐데 왜 그러느냐”라고 말했더니 그는 “신문에 나온 후에 무슨 소용이 있느냐. 우리 회사에선 신문기사 내용을 보고했다가는 밥줄 끊어진다”라고 대답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정보수집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언론의 보도내용 수준의 정보보고나 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하지만 정치ㆍ사회의 중요 이슈나 이벤트는 신문에 보도되기 전에 담당 정보기관 요원이 먼저 알아 또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 것은 당시 정보기관의 중요한 업무 행태였다.
공화당, 유신, 5공 정권 때 정보기관의 권력남용과 공작정치에 비하면 YS 및 DJ정부의 불법도청은 어린애 장난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청, 회유, 고문을 통해 정보가 수집되고 조작되는 등 헌법에 보장된 인권조항이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YSㆍDJ정부에서의 불법도청을 보면서 그 이전 정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은 정보기관이 여전히 정권의 전유물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두 정권이 정보기관을 정권의 사유물처럼 생각하여 그 책임자를 임명하고 조직을 활용한 것은 그 전 독재정권과 유사했다. 정보기관 책임자가 북한을 방문하여 비밀협상을 벌이고 뉴스의 초점이 되는 것도 박정희 정권이나 김대중 정권이나 비슷했다.
남북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서 정보기관 책임자의 활용 방법이라고 이해할 측면이 있는지 모르지만, 정보기관을 정권의 전유물로 왜곡시키는 데 가장 기여한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들은 도청 파문에 대한 관심으로 X-파일에서 드러난 정경유착의 진상, 도청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과 불법도청 방지, 나아가서 국정원 국내 파트의 존치 여부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런 일들에 대한 매듭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국정원을 비정치적 국가기관으로 개혁하는 일이다. 이번 불법도청 파문의 도화선은 X-파일이지만, 이 사태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국정원이 정권의 전유물로서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국민의 국정원으로 거듭나야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이다. 국가안보와 관련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북한과 화해하고 남북교류가 빈번할수록 관련 정보 수집과 분석은 더욱 긴요하며, 더 경계하고 긴장해야 할 일들이 많다고 본다.
급격한 세계화와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변동에 직면하여 국가차원의 정보수요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대통령은 과거처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 국정원장으로부터 더욱 긴밀하고 객관적인 자문을 받아야 한다.
정권의 전유물이 아닌 국민의 국정원으로 개혁하는 것은 이해가 충돌하는 다른 개혁 의제와 달리 대통령과 국정원장의 신념만 확고하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풀릴 일이라고 본다. 대통령과 국정원장의 마음속에서 시작해야 할 개혁이라는 뜻이다.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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