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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외교문서 공개/ 파병따른 안보위기 심각…美는 냉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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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외교문서 공개/ 파병따른 안보위기 심각…美는 냉랭

입력
2005.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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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반 한국 정부는 경제개발 추진이라는 실리와 자유의 연대에 동참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 파병을 결정했지만 북한과 중국의 위협에 심각히 고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베트남전에 몰두한 미국은 박정희 정권의 이런 우려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고, 한미관계는 1970년대 들어 냉각기에 빠졌다.

한국 정부가 1964년 미국으로부터 2차 파병(건설지원단)을 요청받고 미국에 요구한 전제요건에는 이 같은 안보위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김성은 당시 국방장관은 하워즈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추가파병으로 현재의 방위력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절대적인 여론인 만큼 현재 미국이 유지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병력을 계속 유지 강화할 것이라는 확고한 보장을 공표해 달라”고 요구했다.

김 장관은 베트남으로 빠져나가는 한국군의 군사장비를 대체하는 장비를 보충하고 병력수송용 함정과 항공기 연료제공 등의 조건도 걸었다.

미국측은 다소 냉랭했다. 하워즈 사령관은 1965년 1월 김 장관에게 “주한미군을 현 수준에서 계속 유지하기 위한 공식적인 보장은 해드릴 수 없다”는 부정적 서신을 보낸다. 그는 대체장비 보충에 대해서도 “유류제공은 가능하지만 장비보충은 즉각적인 전망이 없다”고 발을 뺐다.

미국의 미온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박 정권은 경제개발이라는 시급한 과제 때문에 전투병력 파병까지 강행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파병 이후에는 각종 국제회의에서 한반도의 안전보장을 주창하는 외교전에 매달렸다. 특히 1ㆍ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이 일어난 1968년 이후에는 외교무대가 더욱 바쁘게 돌아갔다.

1969년 1970년 잇따라 열린 월남전 참전국 외상회의에서 최규하 당시 외무장관은 북한의 도발을 집중 제기하며 “우리 연합국은 자유아시아 제국을 하나씩 공산화하려는 북괴 및 중공의 기본전략에 끌려 들어가서는 안 됨이 명확하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 가운데 ‘아국과 자유아세아의 안전보장 대책시안에 대한 대통령 각하 분부’는 월남전 파병으로 인한 안보공백 우려를 가장 극명히 보여준다.

1960년대 말 전후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문서는 아시아지역에서 공산세력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 대만 등을 아우르는 지역방위기구의 결성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담고 있다.

6개항으로 구성된 지시사항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본 지역적 방위기구 형성에 있어서 전반적인 목적과 방향을 더 뚜렷이 해 중공을 위시한 아세아 공산주의를 저지한다는 생각으로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박 대통령은 “극동에서 한국, 일본, 중국(대만) 등 3국을 빼놓고서는 이런 힘을 쓸 수 있는 공동방위체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겠는가”라며 구성국가를 명시했다.

“공동선언 또는 문서교환 등으로 할 것이 아니라 확실한 조약기구로서 형성하는 것을 검토하라”고 미국과의 교섭방안까지 제시했다.

하지만 이 구상은 현실화하지 못하고 결국 폐기됐다. 베트남전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주한미군 1개사단 철수를 통보하는 등 미국이 일방적으로 방위공약을 포기하면서 한국측 구상은 폐기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정곤 기자 j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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