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말 안보위기에 직면했던 한국 정부가 미국의 안전보장 확약을 받은 뒤에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한 사실이 2일 공개된 베트남전 외교문서에서 드러났다.
1967년 초 미소간 합의로 NPT가 생겨나자 미국은 한국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1968년 최규하 당시 외무장관을 만난 포터 주한 미 대사는 “한국측에서 (NPT가입을) 질질 끌다가 꼴보기 흉한 측(Unpleasesant Group)에 끼지 않도록 하기 바란다”고 거의 협박조에 가까운 발언을 한 것으로 회담록은 기록하고 있다.
최 장관은 “가장 맹방인 한국을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귀하는 무슨 대한(對韓)외교를 잘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느냐”고 맞받아 쳤다.
1968년 1ㆍ21사태와 푸에블로호사건이 연달아 터지자 한국정부는 심각한 안보위기를 느끼고 핵무장을 포기하는 NPT가입을 주저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최 장관이 68년 6월28일 포터 대사와의 면담에서 “NPT에 가입하면 핵보유국이 핵무기를 주지도 않고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해 꼭꼭 묶여있게 된다”며 미국의 안전보장을 요구한 것은 한국 정부의 고민을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다
. 최 장관은 이어 “소련은 NPT회원국이기 때문에 북괴에 핵무기를 주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비회원국인) 중공은 다르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의 압력과 안보위기라는 이중의 곤경에 처한 박정희 정권은 미국에게 안보공약의 재확인을 요구하면서 난국 타개를 시도했다.
결국 68년 6월29일 포터 대사가 최 장관에게 전한 ‘아메리카합중국 대사관’ 명의의 각서에서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비롯한 안전보장조약의 성실한 이행을 다짐했다.
1주일 뒤 외무부 구미국은 ‘NPT에 대한 대한민국 가입에 따르는 제 문제 설명’이라는 문서에서 “중공과 북괴가 본 조약에 가입하지 아니함으로써 아국이 핵위협에 직면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미국으로부터 보장을 받아 둠으로써 커버될 수 있다”고 안도하게 된다. 한국은 1975년 4월23일 NPT 정식 비준국이 됐다.
김정곤기자 j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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